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남도 해남(海南)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우수영(右水營)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을 못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터에 1920년 4월 21일 우수영 보통학교의 운동회 날을 맞이하여 전유봉(全酉峰)·박기술(朴奇述) 등과 만나, 조국없는 설움에 분통을 터뜨리다가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박동수(朴東秀)의 집에서 최이규(崔伊奎)·주봉옥(朱奉玉)·박규성(朴圭星)·박용문(朴用文)·이준섭(李俊燮)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우는 한편 독립만세 지원자 성명표를 만들어 새롭게 결의를 다짐하였다.
4월 22일 오후 그는 전유봉·이준섭과 함께 동외리(東外里) 성벽 밖에서 태극기 3개를 만들어 각기 1개씩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우수영 읍내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행진도중에 우수영 보통학교 교사인 장지훈(張志勳)·이우섭(李雨燮)이 달려나와 만류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니 평화적인 시위가 중단되었으며 그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국 1920년 5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목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20·621·62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55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9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46·163·1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