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전남 해남(海南) 사람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자 동월 12일 장재성(張載性)·장석천(張錫天) 등이 학생투쟁지도본부(學生鬪爭指導本部)를 설치하여 광주투쟁을 항일독립시위로 전환시켜갔다.
광주농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이에 호응하여 같은 달 12일 광주농업학교 학생 2백여 명과 함께 제2차 시위투쟁에 참가,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광주고보 부근까지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후 약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4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50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
- 광주학생운동사(광주학생운독립운동기념회, 1974) 106∼118면
- 판결문(1930. 10. 18. 광주지방법원)
- 동아일보(1930. 10. 19)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20∼724면
- 조선일보(1930. 10. 10)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264·1611∼1624·1633∼165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