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전남 해남(海南) 사람이다.
1919년 당시 해남군 해남읍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김동훈(金東勳)·안정석(安正錫)·이형춘(李亨春)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추진하였다.
1919년 4월 1일 김동훈을 중심으로 같은 마을의 신망있는 청년들과 함께 거사를 의논하였는데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어 굳건한 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이들은 사방으로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모든 준비를 진행하였고 거사준비의 일환으로 태극기 제작용 백지와 당목(唐木)을 제공하였다.
약정한 4월 11일 오전 9시경에 태극기 뭉치를 태동(太洞) 거주 천병유(千炳有)의 집으로 옮겼으며 예정시간인 정오경에는 다시 해남로(海南路) 큰 길거리로 운반한 다음 당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날은 해남 장날로 장터안의 군중은 감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손에는 작은 태극기를 들고 1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고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5. 17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1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9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