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5176
성명
한자 金興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0 훈격 대통령표창
1919. 4. 11 전남(全南) 해남군(海南郡) 해남읍(海南邑)에서 여러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 운동에 참여하여 태극기(太極旗)를 흔들고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남 해남(海南) 사람이다.

1919년 전남 해남읍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남읍에서는 4월 6일 나이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어 시민들의 마음을 뜨겁게 격동시킨 바가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김흥룡은 김동훈(金東勳), 안정석(安正錫), 안유석(安儒錫) 등의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태극기 800여 매와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또한 4월 6일에 있은 보통학교 학생들의 장거(壯擧)를 찬양하며 군민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이와 같이 4월 3일부터 11일까지 준비를 갖춘 후 마침내 4월 11일 주동 인사들은 해남로의 큰거리에 집결하여 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삽시간에 군중들이 가세하였고 김흥룡이 당목으로 만든 큰 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도중 해남보통학교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열에 합류하였고 이를 본 군민들이 감격하여 모여들므로써 시위대는 1,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일경의 무력 저지로 대열은 무너지고 그를 비롯한 주도 인사들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5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일본과 싸운 해남사람들의 이야기(해남문화원, 1996) 20面
  • 判決文(1919. 5. 17.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18·619面
  • 全羅南道誌(全羅南道誌編纂委員會, 1993) 第8卷 110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흥룡 - 전라남도 해남(海南) 해남면 만세시위
본문
1897년 9월 13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해남면(海南面) 대화리(大和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 운동 당시 해남군 마산면(馬山面) 복평리(伏坪里)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해남면 해남읍(海南邑)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서울과 각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해남에서도 만세운동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어 갔다. 4월 6일에는 해남 읍내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이는 해남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4월 1일부터 시위를 계획하던 김동훈(金東勳)은 남상권(南相權)·안창석(安昌錫) 등과 함께 4월 3일부터 4월 10일까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 800여 매와 당목(唐木)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 6매를 몰래 제작하며 시위 준비를 해나갔다.거사일로 예정된 4월 11일 장날 아침에 김동훈이 주도한 시위 군중은 해남면 본정(本町)에 있는 천병유(千炳有)의 집에서 출발하여 해남 읍내로 통하는 신작로를 따라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준비해 온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였다. 이들의 행진이 계속 진행되면서 참여하는 시위 군중이 늘어났다. 해남 시장에서 김동훈으로부터 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찬성하여 깃발을 넘겨받고는 시위 행렬에 가세하였다. 이후 읍내에서 직접 깃발을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행진을 벌이며 만세를 불렀다. 시위가 진행되던 도중 해남보통학교 학생들도 다시 시위대에 합류하였고, 다른 군민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그러나 이날 오후 일본 경찰이 출동해 무력으로 시위 행진을 저지하면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겪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5월 광주지방법원장흥지청 1919-04-1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5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5-1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남도 해남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비석 해남항일운동 추모비 전라남도 해남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흥룡(관리번호:3517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