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506
성명
한자 金信濟
이명 金阿其, 金信才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33.5월 전남(全南) 해남(海南) 북평(北平) 동해리 산(東海里 山)속에서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会)비밀 결사(秘密結社)하고 농어민(農漁民)규합(糾合)하여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 6월형(月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전남 해남(海南) 사람이다.

그는 1933년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에서 김홍배(金洪培)·오문현(吳文鉉)과 완도(莞島)의 황동윤(黃同允)이 중심이 되어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成道庵)에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였다.

동회는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인텔리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사무부(事務部)·조직부(組織部)·조사부(調査部)·구원부(救援部)의 조직을 갖추고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동회는 동년 8월 11일 제3차 전체회의를 열고 운동방안에 관해 협의한 결과 운동대상에서 노동자를 제외하고 농민층을 중심으로 활동영역을 제한하였다. 또한 종래와 같은 위로부터의 조직형태를 지양하고 농촌 각 부락에 2∼5명의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결성하여 각 반을 면(面) 단위로 확대한 후 이를 각 군(郡)의 적색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 아래로부터의 조직구성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명칭도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칭하였다.

이후 동회는 완도·해남·강진(康津)·장흥(長興)·영암(靈岩) 등의 지방에 53개의 농민반과 26개의 야경단, 28개소의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조직확대와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장흥·해남·완도 등에서 10여 차례의 소작쟁의, 어업조합(漁業組合) 폐지운동, 강제연금 인출투쟁 등을 지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목적을 관철하였다.

그는 김홍배·오문현·박태술(朴太述) 등과 함께 1932년 11월 이진리(梨津里)의 소작쟁의를 지도하였으며 1933년 1월에는 김홍배·김암우(金巖于)와 함께 부락 고용인의 임금결정 정례집회에서 임금인상투쟁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조직이 노출되어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34년 2월 중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6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36. 12. 28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 형사사건부 및 집행원부
  • 동아일보(1934. 9. 10)
  • 조선일보(1934. 9. 7, 1936. 12. 31)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신제 김아기(金阿基), 김신재(金信才) 전라남도 해남(海南)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본문
1911년 2월 26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북평면(北平面) 이진리(梨津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아기(金阿基)·김신재(金信才)이다. 17세 때 해남의 동광학원을 졸업하고 약 1년간 동광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1년 11월경 김홍배(金洪培)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1932~33년의 2년에 걸쳐 김홍배·박태술(朴太述) 등과 함께 해남군 이진리 마을 빈곤 대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가을걷이가 끝난 11월 소작료 감면 등을 요구하는 소작쟁의를 계획하였다. 1933년 2월에는 동리 사람들의 정례 집회에서 고용인들의 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하였고, 7월에는 김 어업조합의 조합원 공제저금 환불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를 통해 대중의 처우를 개선하고 동시에 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조직적 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해남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 기반을 만들며 활동하던 이들은 대중운동 지도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완도·강진·영암 등 주변 지역의 활동가들과 연계하여 1933년 5월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8월 활동의 중심을 농민에 맞추어 조직을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마을별로 농민반·청년반·부녀반 등을 먼저 조직하고, 이 조직들을 연계하여 큰 지역 단위의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 연계 활동이 경찰에 포착되어 1934년 2월에 강진을 시작으로 전남 전역에서 검거가 시작되었고, 3월 1일 새벽 북평면에서 17명의 청년이 체포될 때 함께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9월에 예심에 회부되었고, 1년여 후인 1935년 12월 21일 예심을 종결하고 공판에 회부되었다. 다시 1년 후인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미결구류일수(未決拘留日數) 545일이 본형 기간에 포함되어 선고 며칠 후 출감하였다. 1967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1년6월 미결구류일수 중 545일 본형에 산입 광주지방법원목포지청형사부 1936-12-28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해남항일운동 추모비 전라남도 해남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신제(관리번호:450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