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전남 해남(海南) 사람이다.
그는 1933년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에서 김홍배(金洪培)·오문현(吳文鉉)과 완도(莞島)의 황동윤(黃同允)이 중심이 되어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成道庵)에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였다.
동회는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인텔리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사무부(事務部)·조직부(組織部)·조사부(調査部)·구원부(救援部)의 조직을 갖추고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동회는 동년 8월 11일 제3차 전체회의를 열고 운동방안에 관해 협의한 결과 운동대상에서 노동자를 제외하고 농민층을 중심으로 활동영역을 제한하였다. 또한 종래와 같은 위로부터의 조직형태를 지양하고 농촌 각 부락에 2∼5명의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결성하여 각 반을 면(面) 단위로 확대한 후 이를 각 군(郡)의 적색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 아래로부터의 조직구성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명칭도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칭하였다.
이후 동회는 완도·해남·강진(康津)·장흥(長興)·영암(靈岩) 등의 지방에 53개의 농민반과 26개의 야경단, 28개소의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조직확대와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장흥·해남·완도 등에서 10여 차례의 소작쟁의, 어업조합(漁業組合) 폐지운동, 강제연금 인출투쟁 등을 지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목적을 관철하였다.
그는 김홍배·오문현·박태술(朴太述) 등과 함께 1932년 11월 이진리(梨津里)의 소작쟁의를 지도하였으며 1933년 1월에는 김홍배·김암우(金巖于)와 함께 부락 고용인의 임금결정 정례집회에서 임금인상투쟁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조직이 노출되어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34년 2월 중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6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6. 12. 28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 형사사건부 및 집행원부
- 동아일보(1934. 9. 10)
- 조선일보(1934. 9. 7, 1936.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