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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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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姜自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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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2006 훈격 애족장
1908년 12월경 전남(全南) 해남군(海南郡) 송종면(松終面)에서 황두일 의진(黃斗一義陣)에 가담하여 부장(部將)강모(姜某)가 의병밀고자를 처단하는데 수행(隨行)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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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전남 해남(海南) 출신으로 황두일의진(黃斗一義陣)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황두일은 심남일부대(沈南一部隊) 기군장(起軍將) 이덕삼(李德三)의 중군(中軍)이었다. 심남일은 1908년 음력 2월경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전남 나주·함평·영암·보성·장흥·강진·해남 일원에서 활동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 9. 1~1909. 10. 10)으로 체포되었다. 강자선은 1908년 음력 12월경 의병장 황두일의 지휘 아래 전남 해남군 송종면(松終面)의 미황사(美黃寺)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중, 황두일의진의 의병 활동을 관헌에게 밀고한 종송면 삼마동(三馬洞)에 거주하는 최덕관(崔德寬)을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강자선·박화선(朴化仙)·이봉기(李鳳奇) 등은 1908년 음력 12월 22일 강모(姜某)를 부장(副將)으로 추대하고, 다음날 23일 새벽 최덕관의 집으로 찾아가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강자선은 1910년 3월 19일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별집 제1집 836면
  •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홍영기, 2005) 402·404면.
  • 判決文(光州地方裁判所 木浦支部:1910. 3. 19)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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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자선 - 전라남도 해남(海南) 후기의병
본문
1886년경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화일면(花一面) 방축(芳丑) 마을에서 출생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전남 각 지역에서도 의병부대가 결성되어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농업에 종사하던 중 해남 북종 고달동 출신의 황두일(黃斗一)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참여하였다. 전라도 일대에서는 1907년 기삼연(奇參衍)과 김용구(金容球)가 중심이 되어 서부 지역 의병부대를 결집하고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대대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으로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한 뒤 여러 부대로 분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갔다. 대표적으로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와 안규홍(安奎洪)의 ‘안담살이 의병’은 주로 화순·곡성·보성·장성·장흥·순천 등 전남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하며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당시 황두일은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해남 일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영암 출신 이덕삼(李德三) 부대의 중군(中軍)으로 편제되어 활동하였다. 이덕삼은 함평·나주·장흥·강진·해남 등지의 의병이 결합하여 조직된 심남일 의병부대의 기군장(起軍將)으로 참여하여 여러 항일 전투를 이끌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주로 단일 부대로 활동하였으며, 때론 여러 개의 부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특히 1909년을 전후로 해서 여러 부대로 분화하게 되는데 이때 이덕삼은 심남일 의병부대에서 분화되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이끌고 해남 등의 연해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덕삼은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해남·완도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일본 거류민들을 습격하여 일본인을 축출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 황두일과 함께 이덕삼 의병부대에 편제되어 활동하였다. 황두일의 지휘하에 주로 해남군 송종면(松終面) 미황사(美黃寺)를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완도와 해남 우수영까지 진출하였다. 주로 일본의 수비대와 헌병대·순사대를 대상으로 공격하였으며, 정면 공격보다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 요격이나 야간 기습 공격과 같은 유격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를 통해 화력과 기본 전술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1908년 12월경 황두일의 지휘 아래 송종면 삼마동(三馬洞)에 거주하던 최덕관(崔德寬)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최덕관은 비밀리에 황두일의 의병 활동을 일본 관헌에 밀고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박화선(朴化仙)·이봉기(李鳳奇) 등과 함께 1908년 12월 22일 강모(姜某)를 부장(部將)으로 추대하고, 24일 새벽 최덕관의 집을 습격하여 총살하였다. 이후 일본 순사의 추격을 받고 결국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1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징역 3년 형에 선고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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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폭동, 모살 징역 3년 광주지방재판소목포지부 1910-03-1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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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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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해남항일운동 추모비 전라남도 해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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