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노응규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노이선(盧以善)의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질을 타고난 그는 전통적인 유학 공부에 힘썼다. 당시 영남유림의 권위로 알려진 성재 허전(省齋 許傳)의 문하에서 배워 30세 전후에 문장을 훌륭하게 지을 수 있는 선비로 숙성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경직된 성리학이나 예론(禮論)에 사로잡히거나, 일신일족(一身一族)의 영달만을 생각하는 고루한 선비는 아니었다. 그는 강화도조약(1876)후 밀려드는 외세의 침략 아래 항상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우국 충군(憂國忠君)의 선비였다. 30세 전후에 지리산록(智異山麓)의 벽지 안의로부터 눈을 돌려 멀리 기호지방까지 덕이 높은 선비를 찾아갔다. 특히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이름이 높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을 찾아 사사(師事)하고,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에게로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국가사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게 한반도 내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빼앗기게 되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을 내렸다. 이에 대항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1895년 10월 11일 밤중에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徹)·김재풍(金在豊) 등이 친일정부의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사건이 있었다. 노응규도 그들과 약속하고 12일 새벽을 기하여 경복궁의 건춘문(建春門)을 열고 들어가서 궁중 수정전(修政殿)에 머물고 있던 대신들을 죽일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위대의 공격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1896년 1월 7일 노응규는 다시 안의에서 거의하였다. 그는 평소에 규합해 두었던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삼고, 문인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최두원(崔斗元)·최두연(崔斗淵)·임경희(林景熙;前司果)·성경호(成慶昊) 등과 더불어 군기(軍器)를 싣고 이백여 리 떨어진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수부(首府)인 진주성(晋州城)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관리 수삼 명을 살해하였다. 이를 본 관찰사 조병필(趙秉弼), 경무관 김세진(金世鎭) 등 관리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이를 목격하고 전해들은 진주 부민(府民)들은 뒤따라 봉기하여 정한용(鄭漢鎔)을 진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노응규 의병 부대는 성내에 포진하고, 정한용 의병부대는 성외에서 포진하게 되었다. 이어서 전 찰방 오종근(前察訪吳鍾根)·전 수찬 권봉희(前修撰權鳳熙)·노유 정재규(老儒 鄭載圭) 등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여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의병장 노응규는 문인 정한용과 함께 국왕에게 창의소(倡義疏)를 올려서, 이번 창의의 불가피함을 강조하고 앞으로 국왕을 위해 몸바칠 새로운 결의를 피력하였다. 또한 사방에 격문(檄文)을 돌려 민중들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니 십여 일에 수천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대구 관찰사 이중하(李重夏)는 도망 온 진주 경무관 김세진을 시켜 남영병(南營兵)을 이끌고 진주 동북방 약 70리 지점인 의령(宜寧)에 포진케 하였다. 노응규는 서재기와 오종근을 보내어 이를 격퇴시키고, 진주 참서관(參書官) 오현익(吳顯益)과 정탐꾼 몇 명을 잡아다가 목베었다. 진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진주 의병부대는 3월 28일(양력) 일제의 침략 교두보인 부산항을 공략하기 위해 의병 부대의 별군을 진주에서 김해로 이동 집결시켰다. 이때 수천 명의 김해 민중들이 적극 호응하였지만, 일본군측은 정보를 수집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의병부대를 먼저 공격해 온 일본군을 맞이하여 4월 11·12일(양력) 양일간에 걸쳐 김해 평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부산항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이에 노응규는 4월 19일 의병을 해산한 후 변성명(變姓名)하고 호남 지방으로 피하여 광주의 종가 노종룡(盧鍾龍)을 찾아 그곳에서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더불어 시세의 일비(日非)함을 개탄하기도 하고 유리 방랑하다가 순창(淳昌)의 이석표(李錫杓)의 집에서 외로운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7년 가을 노응규는 상경하여 판서 신기선(判書 申箕善)의 주선과 법부대신 조병식(趙秉式)의 입품으로 궐내에 들어가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렸다. 이로써 황제의 우비(優批)를 받아 살육당한 부모의 상장(喪葬)을 모실 것을 허락 받았으나 안의의 이배(吏輩)들은 그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노응규마저 살해하려고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899년 3월 19일에야 부모의 상장을 모셔 그의 한을 풀게 되었다.
1902년 10월 규장각(奎章閣) 주사(主事)로 서임을 받고(判任官, 6等), 11월에는 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慶尙南道査檢兼督刷官, 9品)에 임명되고, 11월 6일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서임되어 주임관(奏任官) 6등에 올랐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될 때까지 동궁 시종관(東宮 侍從官)의 중책을 맡아 시종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노응규는 단연 관직을 버리고 거의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이때 고종은 그에게 비밀히 시찰사(視察使)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여 그의 거의를 고무하였다. 먼저 노응규는 노공일(盧公一)과 더불어 광주의 노종일을 찾아가 그곳에서 재기(再起)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노응규는 노공일과 더불어 그의 향리인 경남 창녕군 이방면 석리 용배동(梨房面石里龍背洞)으로 피신, 재거의(再擧義)할 준비를 하였다. 1906년 늦가을 충청·경기·전라 3도의 분기점인 충북 황간군 상촌면 물한리 직평(黃澗郡上村面勿閑里稷坪)으로 들어가 다시 구국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노응규 통수(統帥) 아래 중군장 서은구(徐殷九;前參奉), 선봉장 엄해윤(嚴海潤), 종사 노공일, 수종(隨從)에 김보운(金寶雲)·오자홍(吳自弘)으로 주력부대를 편성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총기와 화약을 모아 무장하고 경부철도와 일군시설(日軍施設)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장차 서울로 진격, 통감부에 육박하여 전 외국인을 척퇴(斥退)시키려는 웅대한 포부 아래 투쟁하였다.
이들의 총병력은 알 수 없으나 빈번한 이동과 합류 등으로 추정하여 상당 인원수의 부대 편성이 있었던 듯하고, 2차에 걸쳐 20리의 지점에서 일·관군(日·官軍)의 척후대(斥候隊)를 괴멸시켰으며, 다음으로 경부 철도파괴, 열차 전복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황간 일대의 전주민들의 전폭적인 자진 협력을 받았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전투를 전개할 수 있었다. 또한 상촌면 직평과 같은 지리적인 요충지를 전략 기지로서 채택한 것은 노응규의 전략적 혜안이 뛰어났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1907년 1월 21일(양력), 장차 서울 진군을 계획하고 있을 때, 밀정에게 그 기밀이 누설되어 그의 수뇌 참모진과 더불어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경성 경무 감옥소로 압송되어 검사의 엄중한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그의 의절을 빛내었다. 동지들이 차입(差入)해 주는 사식(私食) 이외는 일체의 관급식(官給食)을 거절하였다. 2월 4일 발병하여 옥에 갇힌 지 1개월도 못되는 그해 2월 16일(음력 1월 4일)에 순국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암 노응규의 의병 활동은 47세를 일기로 종지부를 찍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33·34·37·38·39·44~46면
- 매천야록 2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52·154·3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193~199·6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187~1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