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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906
성명
한자 權錫燾
이명 權命九, 尹一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86 훈격 독립장
1907. 12. 21 경남 하동군(慶南河東郡)중심(中心)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하다가 의병장(義兵章)으로 추대(推戴)되였으며 총기(銃器)휴대(携帶)하고 군자금(軍資金)모집 활동(募集活動)하던 중 일 수비대(日守備隊)피체(被逮)되어 수감(收監)되어 있다가 탈주(脫走)하여 하동(河東), 진주(晋州), 함양 등지(咸陽等地)에서 일군(日軍)전투(戰鬪)하고 전전(轉戰)하다 1909. 10. 10 다시 피체(被逮)되어 종신형(終身刑)을 받고 6년 9월의 옥고(獄苦)를 치른 (後) 출옥(出獄)하였으며 1918. 4. 15에는 군자금(軍資金)등을 모집 활동(募集活動)하다 다시 피체(被逮)되어 8개월간(個月間)옥고(獄苦)를 치르는등 현저(顯著)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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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경남 함양(咸陽) 사람이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크게 분노하여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에 참가하였다가 고광순(高光洵)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1907년 10월 17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였으며, 박인환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에는 하동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동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붙잡혔다. 하동주재소에 구금 중 그는 1908년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다가 일경의 추격을 받아 흉부에 총상을 입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1909년 3월 그는 다시 이학로(李學魯) 의병장과 합세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하순 박매지(朴每之)·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山岐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수비대와 마주쳐 피신하였다. 그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09년 10월 10일 진주에서 다시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결국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모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소위 일황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 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그는 1918년 2월 일경으로부터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붙잡혔으나, 10여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그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일경의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일경의 소위 요시찰인 감시가 극심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포항·울진 등 낯선 고장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0. 2. 19 대구공소원)
  • 판결문(1918. 12. 12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진주경찰서장 정보보고(1908. 6. 30, 7. 9, 1909. 10. 11∼10. 13)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석도 권명구(權命九), 윤일이(尹一二) 경상남도 함양(咸陽) 후기의병
본문
1880년 9월 9일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백전면(栢田面) 양백리(兩栢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권명구(權命九)·윤일이(尹一二) 등을 사용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실시하였고,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심화하자 의병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전라북도 정읍 내장산 백양사(白羊寺)에서 봉기한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10월에는 문수암을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에서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고광순 의병부대가 동복읍을 점령하고 지리산 화개동으로 이동 후 구례 연곡사(燕谷寺)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일본군이 문수암에서 화개동(花開洞)으로 이동하자 부대를 둘로 나눠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고광순은 화개동으로 진격하지 않고 본진을 이끌고 연곡사에 남아 후속 작전을 구상하였는데, 함께 연곡사에 주둔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화개동을 떠나 쌍계사(雙溪寺) 방면으로 이동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연곡사를 공격하였다. 새벽에 전개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광순 의병장은 후퇴를 명령하고 전사하였다. 고광순은 전사하였지만 생존한 의병을 추슬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선봉장 이학로(李學魯), 중군장(中軍將) 김경각(金敬珏)·우수보(禹守甫), 후군장(後軍將) 박매지(朴每之) 등을 임명하고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1907년 12월 21일에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으로 이동하여 그곳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하던 박인환(朴仁煥) 등의 요청으로 연합 의병을 결성하고 연합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합천(陜川)·삼가(三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4월에는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임봉구 부대와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도 총기·탄환 등 군수물자를 모집하였는데, 일본군 수비대와 만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해서 하동 일대에서 군수물자를 모집하였다. 모집 대상도 확대하여 각 고을의 부호·유지들에게도 군자금과 무기 등을 모집하였다. 6월에는 무장한 5명의 의병을 하동에 거주하는 여건상(余健相)에게 보내 군자금 1,000냥(兩)을 10일 후에 출연(出捐)한다는 증표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6월 26일에도 군자금 모집을 위해 부하 10여 명을 이끌고 하동군 악양면(岳陽面)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정찰 수색에 나선 하동 주재 일본 순사대의 추격을 받게 되어 치열한 교전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하동주재소에 구금된 지 10여 일 만인 1908년 7월 9일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와 순사대의 추격을 받아 삼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일본군 수비대의 추적을 따돌리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 집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았다. 총상 치료를 받는 중에도 부하들의 의병 활동은 계속되었다. 7월에는 하동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의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처단하고 학교를 소각하였다. 또 같은 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 장재수를 처단하였다. 상처가 거의 나은 뒤인 1909년 3월 의병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때 이학로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수물자 모집을 다시 시작하였다. 진주를 중심으로 군자금 활동을 전개하던 5월 하순에도 박매지·이학로 등 의병을 이끌고 진주 산기동(山岐洞)으로 군수물자 모집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와 마주쳐 급하게 피신하는 일이 있었다. 수색 정찰이 강화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도 필행상(筆行商)으로 변장하여 진주에 들어왔다. 이때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작전인 ‘남한대토벌’ 작전이 시행되고 있어 진주경찰서에서 의병에 대한 정찰 및 수색이 강화된 시기였다. 결국 진주의 민가에 숙박 중 진주경찰서의 순검에게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후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6년 9개월간 복역하다가 1916년 6월 24일 가석방되었다. 가석방 이후에도 일본 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를 받다가 1918년 2월에 일본 경찰이 조작한 강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요시찰 인물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서 거주지에서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고향을 떠나 포항·울진 등지를 떠돌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 4월 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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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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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독립투사 12대장 권석도 공적비 경상남도 합천군
2 동상 권석도의병장 흉상 경상남도 함양군
3 동상 권석도의병장 동상 경상남도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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