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 1.
1940.11.
1941. 1.
1941. 3. 졸업후
1941. 7.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1939년 7월, 왜관(倭舘)철도노선 매립작업에 근로동원되었던 대구사범학교 학생들 중 5학년생(7회)이 중심되어 평소 민족차별을 일삼던 악질 일인교유를 작업장에서 구타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동교 4·3·2학년 학생들은 선배들의 항일저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39년 10월 초순에 각 기(期)별로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하고 우리민족의 역사, 문학서적을 윤독하며 월 1, 2회 모임을 가졌다. 이때 동교 4학년생(8회)이던 그는 동년 10월 하순에 동교생 박효준(朴孝濬)·강두안(姜斗安)·문홍의(文洪義)·유흥수(柳興洙)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합의하고, 윤독회를 통하여 원고를 수집하는 한편, 방학 동안에도 귀향하지 않고 수집된 원고를 편집, 제작하여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것이었고 책자는 약 200부를 발간하여 학생들에게 배부되었다. 그러던 중 학생들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게 되었고 다가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1940년 11월 23일, 그는 박효준·강두안 등 위의 동지들과 함께 당시 대구 봉산정(鳳山町)에 있던 자신의 하숙집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에 관하여 협의하고 표면상 문예활동을 표방하는 항일학생결사 「대구사범학교문예부(大邱師範學校文藝部)」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운동방침으로서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등을 결의하고 동지포섭에 힘쓰면서 1940년 11월 30일부터 1941년 3월 9일에 걸쳐 회합을 갖고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을 함양하였다. 한편 문예부와는 별도로 1941년 1월에는 임굉(林宏)·장세파(張世播)·강두안 등과 함께 당시 대구 동운동(東雲洞) 소재 이무영(李茂榮)의 집에 모여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되어 「문예부」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회는 겉으로 학술연구를 위장하면서 민족의식 앙양과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을 목적한 결사였는데 그는 동회의 문학부 책임으로 활동하였다. 동회는 1941년 2월부터 1941년 3월까지 6회의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졸업기를 당하여 회원들이 졸업을 하게 되었으므로 동회는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하였다. 즉 이들이 졸업 후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회원들은 현지에서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고 사무원은 각지에서 보고된 상황을 취합하여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우송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공문을 가장하기로 했다. 이렇게 문예부, 연구회를 통하여 활동을 전개하던 그는 1941년 3월, 졸업 후 경남 창령군 대합(大合)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65·767·769·775·77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00·801·808·811·812·815·816·825·826면
- 예심종결결정(1943. 2. 8 대전지방법원)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56·59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