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0년 합병 후에 2차에 걸쳐
3. 1919년 3월
4. 1921년 7월
- 복역(服役) : 징역을 삶.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고성(固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咸安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통감부(統監府)와 일본 정부에 논책문(論責文)을 보냈다가 몇차례 구금되었으며, 1910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자 만국공관(萬國公館)에 호소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朝鮮總督)인 사내(寺內)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내었다가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馬山)지청에서 징역 3월에 2년간 집행유예형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당시 한문교사로 있던 그는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 함안군내 청년유지들의 배후 고문 역할을 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같은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에게 연락하였다.
이에 따라 3월 19일 정오부터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장터를 출발하여 경찰주재소·군청·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고, 도처에서 일본 군경과 충돌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후 그는 이곳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부산감옥 마산분원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위가(自慰歌) 옥중에서 지음
하늘이 덥고 땅이 시름이여 이에 사람이 있도다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심이여 나의 몸이 있도다 인군이 있고 나라가 있음이여 이에 이상(彛常)을 온전히 하리로다 인군과 부모가 일체임이여 만고에 큰강령이라 나혼자 이 때아닌때 남이여 몸도 용열하고 재조도 어질지 못하다 하늘이 나라를 도라보지 않음이여 참아 금수와 견양을 보겠는가 난신역자가 다 후백(侯伯)이 됨이여 슬프다 저 적과 같이 날뛴다 인군의 원수를 갑지못하니 신민의 큰수치로다 맹서코 한 하늘을 같이이고 살지 않으리라 죽으면 영화되고 살면 욕됨이여 七十늙은이가 무엇을 경영할고 다만 원컨대 일직 지하에 돌아가 우리인군을 보이고 자세히 아뢰리라 이것으로 나의 마음을 결정하고 나의 정을 위로하여 큰노래를 부르니 천지가 망망하도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7면
- 판결문(1919. 8. 20 대구복심법원)
- 동아일보(1922. 1. 24)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9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