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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92
성명
한자 朴尙燁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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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20 경남 함안군 군북장날에 신창학교생(新昌學校生) 50여명이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자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이 합세하여 출동한 일군과 대치하고 투석전을 벌이다 주재소(駐在所)를 파괴할 때 일군경(日軍警)의 무차별 발포로 사살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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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의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2·153면
  • 제적등본(군북면장 발행)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상엽 - 경남 함안(咸安) -
본문
1855년 6월 30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오곡리(烏谷里)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배웠고,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시점에는 이미 60대 중반의 나이로 지역 유림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곡기를 끊고 통곡으로 나날을 보내며 의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1919년 함안군 군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함안은 전통적으로 경남에서 유림이 강한 지역이었다. 1919년 고종의 국상에 참여한 함안 지역 사람들이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갖고 돌아온 것을 계기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함안지역의 만세시위는 3월 9일 칠북면(漆北面) 이령리(二靈里) 연개장터 시위로 시작되었다. 이어 12일과 17일 대산면(代山面) 평림장터 시위, 18일 칠서면(漆西面) 이룡리(二龍里) 시위를 거쳐, 19일 함안면 읍내시위와 20일 군북면의 시위로 절정을 이루었다.군북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0일 군북면 장날 해질 무렵에 주도자들이 백이산(伯夷山) 서산서당(西山書堂)에 모여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논의하며 시작되었다. 거사 일시는 3월 20일 장날 정오, 장소는 군북장터로 결정하고,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등과 같은 준비 업무를 분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집이 시위 준비 장소인 서산서당과 여항산(艅航山) 원효암(元曉庵)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준비 모임 관련 연락과 태극기 제작에 필요한 물품 조달을 담당하였다.거사 당일인 3월 20일 오전 9시, 덕대리(德垈里) 남단 동촌리(東村里) 사립 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주도자 조상규(趙相奎) 등과 학생 50여 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북경찰관주재소에 파견되어 있던 진해만 중포병대대 특무조장 다이마 기지로(泰間喜治郞) 이하 16명의 일본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시위 주도자들은 계획대로 군북면 장터로 이동하여 정오에 시위를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예상보다 많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자 장소가 협소하여 장터 인근 냇가로 변경하고 군중을 안내하였다.시위는 오후 1시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상규가 냇가 둑 위에 올라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또 다른 주도자인 조용규(趙龍奎)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그곳에 모였던 수천 명의 참가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다시 일본군 중포병대대가 출동하여 공포탄 발사 등의 진압이 시작되면서 흩어졌으나, 오후 2시 재집결하였고, 시위 군중은 5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군북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한편 돌을 던지며 돌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과 경찰은 20여 발의 경고 사격을 가하였으나, 성난 군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돌을 던지면서 주재소로 전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군과 경찰에 의한 조준 사격이 시작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함안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군북 3.1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함안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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