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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89
성명
한자 朴魯一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 3.1독립운동 시(獨立運動時) 함안군(咸安郡) 총책(總責) 주재소(駐在所) 파괴하다가 사망자(死亡者) 10명 부상자(負傷者) 50여명 발생(發生)

2. 도피 생활(生活) 8년만에 통영서(統營署)피체되어 2년의 옥고(獄苦) 생활(生活)

(공적서(功績書))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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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여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대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으나 곧 탈주하여 계속해서 피신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99·30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노일 호 : 송암(松岩), 이명 : 신평중(辛平仲) 경남 함안(咸安) 함안면 만세시위
본문
1894년 10월 11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여항면(艅航面) 여양리(艅陽里)에서 태어났다. 호(號)는 송암(松岩)이고, 이명으로 신평중(辛平仲)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함안면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함안지역 만세운동은 고종 국상에 참여한 지역 인사들이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서울의 만세운동을 알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국상에 참여한 인사들과 지역의 인사들이 모여서 함안면 읍내 만세시위 계획을 논의할 때 참석해 뜻을 함께 하였다. 함께 한 인사들은 고종 국상에 다녀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조병흠(趙丙欽)·조문국(趙文國)·안재휘(安在輝)·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과 대산면(代山面)의 안지호(安知鎬), 함안면(咸安面)의 곽종한(郭鍾漢), 가야면(伽倻面)의 이희석(李喜錫) 등이었다. 이들은 3월 19일 함안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였고, 만세시위에 필요한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의 등사,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등 역할을 분담하였다.3월 19일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내고, 읍내 중심가인 봉성동(鳳城洞)에 모여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태평루(太平樓)에 태극기를 걸고,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 이희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선창을 한 것을 신호로 모여 있던 수백 명이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날 선두에 서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가 전개되면서 장날 읍내에 나왔던 사람들까지 가세하였고, 시위 군중은 급격히 늘어났다. 일본 군경 추산 2,000명이었다. 시위대는 함안경찰관주재소, 군청, 함안우편소, 법원출장소 등 주로 지역의 식민통치기관을 목표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자 출동한 일본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시작되었다. 분노한 시위대는 주재소·군청 등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집기와 서류를 파손하였다. 그리고 관계자들을 구타하고 압력을 가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 군중에게 붙잡힌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에게 반성을 요구하며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울러 안혁중(安赫中)·이종찬(李鍾瓚)·조계승(曺啓承) 등과 함께 군수에게 독립만세 운동을 거행했다는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요구하였다.만세시위 규모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시위 양태가 격렬해지자, 일본 경찰은 마산 주둔 중포병대대의 군 병력 투입을 요청하였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 중포병대대 16명이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면서 시위대의 기세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주도자들 중 일부는 다음날인 20일 군북면(郡北面) 장날 시위가 예정되어 있어 미리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일본 군경의 대대적인 주모자 검거 작전이 시작되자, 몸을 피했고 다음날 군북면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결국 붙잡혔으나, 곧 탈주하여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24년 7월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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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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