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공훈전자사료관 ▒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Logo

경고 아이콘

찾으시려는 웹페이지는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입니다.

찾으시려는 페이지의 주소가 잘못 입력되었거나, 페이지 주소의 변경 혹은 삭제로 인해 현재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페이지의 주소가 정확한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계속해서 해당 페이지가 보이신다면 공훈전자사료관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550
성명
한자 盧秀貞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20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시위를 감행하던 중 피체되어 1919. 6. 27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마산지청(馬山支廳)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7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집행원부(부산지방검찰청발행)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노수정 - 경남 함안(咸安) 군북면 만세시위
본문
1894년 10월 26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중암리(中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함안 군북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함안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기하여 3,000여 명이 봉기하였고, 격렬한 시위 끝에 65명이 검거되는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던 이들 중 일부는 다음 날인 3월 20일 군북 장날의 의거를 계획하였는데,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 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1919년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 명의 학생과 군중이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군북 장터는 장꾼과 시위 군중으로 발 디딜 틈이 없어 거사 장소를 군북 냇가로 변경하였고, 오후 1시경 군북 냇가에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이날 시위에 참여해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궐기하였다. 경찰은 마산경찰서장과 헌병대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고,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비상 출동하여 시위 대열의 진압에 나섰다. 군경은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 군중을 해산하다가 실패하고 군북경찰관주재소로 철수하였다.오후 5시경 5,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우체국과 면사무소를 거쳐 군북경찰관주재소로 달려갔다. 시위 군중과 함께 군북경찰관주재소를 포위한 채 독립만세를 외치고, 전날인 3월 19일 함안장날 의거에서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군경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대는 투석으로 대항하며 군북경찰관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군경이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2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군경 측에서도 1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이날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燒燬)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군북 3.1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함안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노수정(관리번호:2550)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