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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59
성명
한자 羅守凡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20. 경남 함안군 군북(郡北)장날에 신창학교생(新昌學校生) 50여명(餘名)군중(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를 벌이자 장터에 모인 3,000여명(餘名)합세(合勢)하여 출동(出動)일군(日軍)대치(對峙)하고 투석전(投石戰)을 벌이다 주재소(駐在所)파괴(破壞)할 때 일군경(日軍警)무차별(無差別) 발포(發砲)사살(射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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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제적등본(1919. 3. 20 순국)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나수범 나범숙(羅凡淑),나해숙(羅海淑) 경상남도 함안(咸安) 군북면 만세시위
본문
1902년 3월 28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소포리(小浦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나범숙(羅凡淑) 또는 나해숙(羅海淑)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군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함안지역에서는 3월 19일 함안장날 만세시위에 이어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지역 시위 양상은 격렬하였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들 중 일부는 검거를 피하고, 다음날인 3월 20일 군북 장날에 의거를 감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주도자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1919년 3월 20일 전개된 군북면 장날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시위를 벌이기로 한 정오 무렵 주민들과 함께 군북 장터로 나갔다. 이 날 오전 9시에 이미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북 장터에 장꾼과 시위 군중이 넘쳐나자 거사 장소를 군북 냇가로 변경한다는 통지를 받고, 주민들을 이끌고 군북 냇가로 이동하였다.이어 이 날 오후 1시, 군북 냇가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우체국과 면사무소를 거쳐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해 독립만세를 외치고, 3월 19일 함안장날 만세시위 때 붙잡힌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가 점점 확대되자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비상 출동하여 총을 발사하며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상인은 물론 농부와 부녀자들까지 독립만세를 부르는 행렬에 합세하면서 오후 5시 시위대 규모는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이때 시위 군중을 이끌며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가 경찰관주재소에서 투석전을 벌이며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시위 주도 인물에 대해 조준 사격을 감행하고 군중을 향해 소방호스로 검은 물감을 분사하였다. 이날 총격으로 시위 현장에서 21명이 사망하였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선두에 서서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함안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군북 3.1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함안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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