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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914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學坤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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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9 함안(咸安) 3.1운동에 참가하여 1919.8.20 대구복심원(大邱覆審院)에서 징역3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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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그는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기도 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이어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로 시위행진하며 그곳들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대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8. 20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97∼30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학곤 - 경상남도 함안(咸安) 함안군 함안시장 만세운동
본문
1889년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읍내면(邑內面, 현 함안면) 북촌리(北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31세로, 3월 19일 함안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함안군의 만세운동은 대산면(代山面) 산서리(山西里)의 한문 교사인 안지호(安知鎬)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강제병합 이후 독립의 뜻을 품고 함안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하고 태극기와 대한독립 깃발을 만들어 1919년 3월 19일 함안장터로 갔다. 그러나 함안경찰주재소 일본인 순사에게 붙잡혀 주재소로 끌려갔다.이날 오후 3시경, 장터에 모인 약 2천여 명의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때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안지호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의 담장과 유리 및 기타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함안군청, 부산지방법원 함안출장소, 함안공립보통학교, 함안우편소, 함안심상소학교 등을 차례로 돌며 각 곳의 유리와 기물을 부쉈다.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먼저 주재소에 진입하여 다른 사람들이 진입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우편소를 습격할 때 전화기를 파괴하여 전화에 의한 통신을 방해하였으며, 등기소를 습격할 때도 적극 앞장섰다.오후 5시 40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한 일제는 마산 중포병대대와 경찰을 출동시켜서 다음 날인 20일까지 65명을 검거하였다. 이때 붙잡혀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요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징역 3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8-2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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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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