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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556
성명
한자 金成淑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19 함안군(咸安郡) 함안읍(咸安邑) 독립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다 구금자 석방을 위하여 경찰관 주재소, 함안(咸安)군청, 우편소 등 건물을 파괴하며 시위를 전개하다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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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등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고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기도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로 시위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집행원부(부산지방검찰청 발행)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97∼30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성숙 - 경상남도 함안(咸安) 함안면 만세시위
본문
1870년 12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강명리(康命里)에서 태어났다. 함안면 만세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 참여차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3월 5일경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열(韓灌烈) 등 청년 유지들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이들은 일본 군경과 밀정의 눈을 피해 모의를 거듭하여 3월 19일의 함안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또한 여러 지역에 연락원을 보내어 동지들로 하여금 군중을 규합하여 거사 당일에 약속한 장소로 모이도록 하였다. 3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함안면의 시장에 모여들자, 오후 12시경 주도 인물들은 비봉산에 올라 고천제(告天祭)를 지낸 후 군중과 함께 봉성동(鳳城洞)으로 집결하였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군중에게 배부되었고 태평루(太平樓)에 대형 태극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이날 시위대의 한사람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오후 2시 3,0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과 함께 함안경찰관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마산경찰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현지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군중과 함께 도끼·몽둥이·돌 등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군청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시위 군중과 함께 등기소·우편소·부산지방법원 함안출장소·함안심상소학교·함안공립보통학교 등으로 몰려가 투석하며 유리창·판자벽 등 기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 40분경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의 연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여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였고,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검거하였다. 이 시위에서 체포되어 1919년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함안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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