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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696
성명
한자 金三道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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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3.20 경남(慶南) 함안군(咸安郡) 군북(郡北)장날에 신창학교생(新昌學校生) 50여명이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자 장터에 모인 3,000여명이 합세하여 출동한 일군(日軍)과 대치하고 투석전을 벌이다 주재소를 파괴할 때 일군경(日軍警)의 무차별 발포로 사살(射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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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0·302면
  • 제적등본(1919. 3. 20 중암리에서 사망)
  • 사실증명(함안군 군북면장 발행)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삼도 - 경상남도 함안(咸安) 3.1운동
본문
1896년 5월 9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오곡리(烏谷里)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군북면 군북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군 만세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간직해서 돌아온 조한휘(趙漢輝)·조병흠(趙丙欽)·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3월 19일 함안장날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조한휘는 이곳 유지 이희석(李喜錫)·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 등과 만나 만세 시위를 논의하였다. 이후 이희석은 바로 군북면 사촌리(舍村里)로 가서 조상규(趙相奎)·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조주규(趙周奎) 등에게 군북면에서도 함안 장날 의거에 동참해줄 것을 권하였다. 이들은 함안 장날 만세 시위에 동참하기로 함과 동시에 군북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군북면 각 마을의 군중 동원을 책임질 주동자들을 모았다. 군북면은 박상엽(朴尙燁), 소포리는 이재형(李在蘅), 하림리는 조용태(趙鏞台), 중암리는 노수정(盧秀貞) 등이 맡기로 하였다. 이때 오곡리의 군중 동원 책임을 맡았다. 3월 10일 군북 장날 해질 무렵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백이산 서산서당에 모여 거사 계획을 논의한 결과, 장소는 군북 시장, 거사일은 장날인 3월 20일 정오로 결정하였다. 박상엽·김우곤·이원필 등과 함께 여항산 원효암 의상대에서 등사된 태극기의 태극에 붉은 물감을 칠하고 깃대를 만들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무지게와 장보따리에 숨겨 군북시장으로 옮겼다. 3월 19일 함안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일제 경찰들의 감시가 심해졌다. 따라서 20일 군북에서는 2단계로 나누어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1단계는 3월 20일 오전 9시경 조상규 등이 군북면 동촌리(東村里) 신창야학교에서 50여 명의 학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경찰이 군북경찰관주재소로 파견되어 있던 진해만 중포병대대 특무조장 이하 16명을 출동시켜 해산시켰다. 2단계로 군북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군중이 너무 많이 모여 장소를 군북 냇가로 변경하였다. 3,000여 명의 군중이 냇가에 모이자, 이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 전단을 배포하고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군중은 순식간에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놀란 일본 군경은 병력을 비상 출동시켰으나, 시위 군중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오후 2시경 군북우체국과 군북면사무소를 거쳐 군북경찰관주재소로 가서 독립 만세를 계속해서 외쳤다. 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포위하고 돌을 던지는 등 공격을 하였다. 일본 군경은 소방차에 검은 물감을 타서 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뿌리고 공포를 쏘았다. 이에 격분하여 계속해서 돌을 던지면서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결국 일본 군경은 주동자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였고, 2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하였다. 부모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촌 동생이 시신을 수습하여 다음 날 새벽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함안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군북 3.1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함안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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