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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525
성명
한자 具載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19 경남(慶南) 함안군(咸安郡)에서 박노일 등(朴魯一等)주동(主動)독립만세 시위(獨立万歲示威)참가(參加)하며 다수(多數)군중(群衆)과 같이 독립만세(獨立万歲)고창(高唱) 시위(示威)하고 주재소(駐在所)습격(襲擊)하여 투석(投石) 파괴(破壞)하는 등 활동(活動)하다 일경(日警)에게 체포(逮捕)되여 징역 1년형(年刑)언도(言渡)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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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례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경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이어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로 시위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5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8. 20 대구복심법원)
  • 집행원부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구재옥 - 경상남도 함안(咸安) -
본문
1890년 11월 13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봉성동(鳳城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함안면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적극 가담하였다. 함안면 만세 시위는 고종의 인산(因山) 참배차 상경하였다가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 등이 계획하였다. 이들은 대산면의 한문교사 안지호(安知鎬)와 연락하는 한편 함안면 장날인 3월 19일을 거사 일로 정하였다. 거사에 앞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마련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3월 19일 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자 군중은 약 3,000명으로 불어났다. 이때부터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오후 2시경 군중이 경찰주재소로 행진을 시작하자 시위 진압을 위해 현지에 나온 마산경찰서장 기타무라(北村) 경시가 이끄는 경찰들이 무력을 써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에 시위 군중이 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주재소에 돌입하여 집기를 부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시위 군중은 일제 경찰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그들을 구타하였다. 이어 군청 문을 부수고 들어가 군수 민인호(閔麟鎬)에게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시위 군중은 이외에도 우체국과 등기소 등 관공서 건물의 기물을 파괴하였다. 한편, 조한국(趙漢國)과 강상중(姜相中)은 함안과 마산 간 통신선을 끊어 경찰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오후 5시 40분경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함안에 도착하였다. 함안과의 연락이 닿지 않자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고 출동한 것이었다. 출동한 병력과 현지 경찰이 합세하여 주동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마산경찰서로 호송되었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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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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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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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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