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1931년 진주사범학교 특과(特科)를 졸업한 후 사천공립보통학교(泗川公立普通學校) 및 명지(鳴旨)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여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한편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1월 경남 진주에서 동지 김두영(金斗榮) 등과 모임을 갖고 각 부문운동별로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연계투쟁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중에서 강용운, 김두영 등은 교사였던 관계로 비밀결사 교육노동자협의회(敎育勞動者協議會)를 결성하기로 하고 생활권 옹호,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획득, 제국주의 교육타도, 조선인 본위의 교육실시 등의 강령을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8일 마산만의 선상(船上)에서 강용운을 비롯한 김두영·이화준(李華俊)·정두명(鄭斗明) 등이 회합하여 반전의식(反戰意識) 고취, 교내 일본어 상용 반대, 소위 국민정신 작흥(作興) 반대 등 35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한 후 교육노동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중앙부 책임 김두영, 조직부원에 이화준 등의 부서를 정하고 경남지역을 중부, 동부, 서부로 나누어 각기 책임지역을 분담하는 등 조직의 편제를 갖추었다. 보통학교 교사인 강용운 등은 학생들에게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시키는 한편 농촌경제의 절박한 상황, 보통교육의 학자(學資) 부족, 적령아동의 격증, 수업료 미납현상 등 식민지 교육제도의 모순을 알려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이 일제에 발각됨으로써 1933년 8월경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34. 7. 5. 釜山地方法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李起夏, 1976) 1422·1424面
- 東亞日報(1933. 12. 12, 12. 13, 1934. 4. 22, 6. 28,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