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동맹휴교를 주도하고, 일본에서 조선유학생연구회(朝鮮留學生硏究會)를 결성하여 조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4학년인 강대성은 광주학생운동을 듣고 일본 경찰이 조선인 학생만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학교 학생인 심홍택(沈弘澤)·강상덕(姜相德)·황한희(黃翰橲) 등과 회합하고 학무국장 및 교장에게 제출하기 위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였다. 진정서는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의 선전부장인 같은 학교 4학년 김순희(金淳熙)가 제시한 ''광주학생사건에 관련하여 검거된 자를 석방하고,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부여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를 1929년 12월 9일 같은 학교 학생인 최진한(崔鎭漢)이 교장에게 제출하였고, 강대성은 진정서를 필사(筆寫)하여 수십명의 학생들에게 낭독한 후 동맹휴교를 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하여 ''광주학생 만세'' 고창(高唱)과 ''우리들은 광주 생도에 동정하여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동맹휴교를 단행하자''라고 연설하였다.
강대성은 이 일로 붙잡혀 1930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이후 강대성은 일본의 조도전대학으로 유학하였다. 그리고 1936년 6월 25일 동경시(東京市) 신전구(神田區)에서 명치대생(明治大生) 박용칠(朴容七)·우삼흥(禹三興), 일본대생(日本大生) 장재성(張載性) 등 약 30여 명과 회합하여 각 학교 조선인 학생의 연락기관으로 조선유학생연구회를 결성하였다. 강대성은 2월 1일 임시총회에서 조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강연회 개최 및 조선인 학생에 대한 민족의식 함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38년 5월 19일 우삼흥이 붙잡히고, 이어서 강대성도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강대성은 이 일로 인하여 1939년 12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3輯 160·163面
- 日帝侵略下 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2輯 171∼174面
- 光州學生獨立運動史(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96) 129·130·136面
- 東亞日報(1930. 2. 9, 9. 15, 9. 20, 9. 21, 10. 17, 10. 26, 10. 31, 11. 1, 11. 2, 11. 19, 11. 20, 11. 21, 12. 13, 12. 16, 12. 20, 12. 21)
- 光州學生獨立運動史(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74) 369·401∼429面
- 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鄭世鉉, 1975) 375∼37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578∼583面
- 朝鮮日報(1930. 11. 20, 12. 14, 12. 20, 12. 21)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86∼293·1161·1171·1241面
- 騎驢隨筆(宋相燾) 400·411∼412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3卷 691·698·774∼775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5卷 380·384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