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봄 경북 (慶北) 영천 (永川) 에서 정용기 의병진 (鄭鏞基義兵陣) 이 산남의진 (山南義陣) 을 거의 (擧義) 하니 입진 (入陣) 하여 경북 (慶北) 영천 (永川) 청송 (靑松) 등지 (地) 에서 항상 (恒常) 용명 (勇名) 을 떨치고 활동 (活動) 하다가 1907년 입암전투 (立岩戰鬪) 에서 정용기 의병장 (鄭鏞基義兵將) 을 비롯 3장군 (將軍) 이 전몰 (戰歿) 하니 의병진 (義兵陣) 이 해산 (解散) 되어 귀가 (歸家) 은신 (隱身) 하고 있다가 의병 색출 (義兵索出) 에 혈안 (血眼) 이 되어 있는 일인 (日人) 에게 피체 (被逮) 되어 총살 순국 (銃殺殉國)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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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영양(英陽)·청송(靑松)·진보(眞寶)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을 벌였다.
그 뒤 이듬해 7월 입암(立岩) 전투에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고 의진이 해산되자, 은둔하였으나 1908년 6월 20일 자택에서 일군에게 붙잡혀, 현장에서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山南倡義誌(下) 69面
- 咸安趙氏大同譜 第3篇(1979. 11. 30) 墓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