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조공곡은 경북 청송(靑松) 출신으로 1907년 음력 4월 하순부터 청송에서 남우팔(南又八),이이동(李梨洞) 등과 함께 거의하여 포술장(砲術將)으로 활동하였고, 동년 음력 7월 2대 대장 정환직(鄭煥直)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흥해,영덕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조직한 의병 진영으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정용기는 일본군 토벌대에 패한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을 돕기 위해 영해로 진군하던 중 1906년 4월 28일 경주 우각(牛角)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에 체포된 뒤 1906년 7월 하순경 해산하고 말았다. 1907년 4월 재기한 정용기는 영해,청하,청송,포항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9월 초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는 수십 명의 장령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정환직은 스스로 산남의진의 2대 의병장이 되어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정비한 뒤, 흥해,신령,의흥,청송,영덕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 분파소와 헌병 분견대, 그리고 우편국 등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2월 7일 영덕전투(盈德戰鬪) 후 일본군에게 포위되자 청하군 각전(角田)에서 부대를 해산하고 12월 11일 고천(高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순국하였다.
조공곡은 정용기가 재기(再起)한 1907년 4월 청송지역의 모병을 담당한 남석인(南錫仁)과 이세기(李世紀)를 따라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포술장(砲術將)으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정환직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조공곡은 1907년 10월 29일 포군초장(砲軍哨長)과 부장(副將)으로 흥해(興海)를 습격하여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 등 3명을 사살하였다. 또 12월 5일 영덕 서암전투에서 남석술(南錫述)이 전사한 뒤, 12월 7일 의병 83명으로 영덕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일본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에 정환직이 청하군 각전(角田)에서 부대를 해산하고 12월 11일 고천(高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순국한 후 조공곡은 청송으로 귀환하였다. 이후 조공곡은 1908년 3월 16일 체포되어 3월 26일 총살,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暴徒에 關한 編冊(대구경찰서:1908. 3. 26)
- 暴徒에 關한 編冊(대구경찰서:1908.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