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처음에는 정용기(鄭鏞基) 의진에서, 나중에는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배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석이는 이같은 시기에 정용기 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을사늑약」이듬해인 1906년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할 것을 결심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은 경북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통유문과 격려문을 각계 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고하면서 총 궐기를 촉구하였다.
또한 정용기 의병장은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진행 계획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하였다. 이 의진에서 활동하던 이석이는 1907년 정용기 의병장이 일경에 피살, 순국한 후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음력 11월 13일 17명의 부하 의병들과 함께 경북 청하군(淸河郡) 죽남면(竹南面)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12월 9일에는 2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청하군 청하읍을 습격하였다. 아울러 1908년 음력 2월 19일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일본군 밀정 이명갑(李明甲)을 처단케 하는 등 군자금 징수와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3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484·525·526·625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2권 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536면
- 매일신보(1913.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