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경북 진보(眞寶) 출신으로 1908년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에 소속되어 경북 울
진(蔚珍)·영덕(盈德)·영양(英陽)·청송군(靑松郡) 일원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
었다.
1906년 3월 13일 영덕에서 창의한 신돌석은 경상북도·강원도 등 동해안 일대
에서 기민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돌석은 일월산(日月山)·백암산(白巖山)·대
둔산(大遯山)·동대산(東大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군을 위협
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구한국군의 합세로 군세를 크게 떨쳐 영양·
진보·청송·경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908년 13도창의대진소(十三
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온 후 평해·영양·울진·봉
화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윤학이는 1908년 음력 5월 28일 신돌석의진에 참여하였다. 그는 신돌석의진
50여 명과 함께 울진군 황정촌(黃亭村) 부근 마을에서 백미 5두(斗), 음력 6월에
는 영해군 오기동(烏基洞)에 숙박하며 백미 7두(斗), 같은 달 진보군 동면 수구
동(水九洞)에 집결하여 영양군 석보(石保) 등지를 왕래하며 백미 16두(斗)를 갹
출하여 군량미로 사용하였으며, 진보읍에 거주하는 권탑동(權塔洞)으로부터 한
전(韓錢) 70냥을 모집하였다. 음력 6월 12일 진보군에 주재한 순사의 습격을 받
고 은신해 있다가 귀향하였다.
윤학이는 소위 폭동죄(暴動罪)로 기소되어 1908년 9월 28일 대구지방재판소에
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1908. 9. 28)
- 刑事控訴事件簿·朝鮮總督府官報(1910. 9. 5)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439~44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