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3월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에 재학 중 학생만세운동 지도부의 일원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일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종로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곧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의 집행위원과 지방부 위원을 맡았고, 1920년 12월 창립총회에서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1년 1월에는 서울청년회 조직에 참여 기관지인「아성(我聲)」의 편집위원으로 많은 글을 투고하였으며 순회강연 활동 등을 펼쳤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였으며, 5월에는 고려공산당(상해파)에 입당하고 기관지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 무렵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는 1922년 10월 러시아의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상해파 소속 마산지역 대표라는 직함으로 참가하였고, 의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대회가 끝나고 1923년 1월 그는 대표 자격으로 코민테른에 파견되었고, 코민테른에 의해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곧 상하이[上海]로 돌아왔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고려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지도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여 개조파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뒤 그는 잠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1923년 6월에는 김지섭(金祉燮)의 투탄의거를 지원하였다. 이 사실이 드러나며 그는 일경의 추적을 받았으나, 1924년 4월 청년동맹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만주로 건너간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선전부 책임이 되었으나, 그 해 말 상해파와 화요파간의 분쟁과 관련하여 출당 조치를 당하였다. 1929년 3월 하순에는 돈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의 책임이 되었다.
1930년 10월 귀국하여 활동하던 그는 일경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선전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유학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공산대학을 다니던 중 1938년 소련정부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資料20-臨政篇 Ⅴ-(國史編纂委員會, 1991) 27면
- 청송의 독립운동사(김희곤 외, 청송군, 2004) 208∼214·254∼290·299·343면
- 島山安昌浩資料集(Ⅰ)(國會圖書館, 1997) 67∼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2∼88면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1976) 504∼506면
- 朝鮮日報(1921. 6. 30, 1924. 4. 12·5. 16, 1931. 12. 8)
- 東亞日報(1921. 8. 15)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