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20년 음 7월경,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의 8인조에 가입, 독립운동을 위해 치성비를 납부·모금하였다.
1901년 강일순(姜一淳)이 세운 흠치교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종교였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흠치교의 조직은 교주 차경석(車京錫)이 있고, 그 아래에 60인의 고문이 있었으며, 고문 아래에 6인조-12인조-8인조-15인조 등의 조직을 갖추고, 각각 30원-15원-10원-5원의 치성비(致誠費)를 내어 일부는 제사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전라도 정읍에 있는 본부에 보내져 독립운동 자금으로도 쓰였다.
신상용은 흠치교의 교도가 되어 1924년에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에 도읍하고 황제에 취임하여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치성비 7원을 내고, 1920년 7월경 진보면 합강동에서 신상진(申相晉) 외 13명에게 전도하여 15인조에 가입시키고, 이들로부터 치성비 29원을 모금하였다. 이렇게 신상용은 교세확장과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이 또한 1922년 2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안동형무소에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安東支廳:1921. 4. 22)
- 判決文(高等法院:1922. 2. 27)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21.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