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수십 년 동안 향리에서 한학을 연구하다가 1909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한족회(韓族會)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하고 있던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한인자치기구이다. 이 단체에서는 재만동포들에 대한 자치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유하현 삼원보(三源堡) 시가에 본부인 중앙총부(中央總部)를 두고 그 최고 책임자로 이 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서무사장 김종훈(金宗勳), 사판(査判)사장 이진산(李震山),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상무(商務)사장 김정제(金定濟),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내무사장 곽 문(郭文), 검사감 최명수(崔明洙) 등을 두어 재만동포의 치안·재무·사법·행정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박영산이 활동한 한족회는 지방자치조직도 체계화하였다. 당시 한족회의 지방 조직은 유하현·통화현(通化縣)·흥경현(興京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輯安縣)·임강현(臨江縣)·해룡현(海龍縣) 등지에 걸쳐 있었으며, 호수는 1만여 호에 달하였다. 이곳에 한족회에서는 동포 1천 호마다 1명의 천가장(千家長)을, 1백 호마다 백가장(百家長)을, 10호마다 십실장(十室長) 1인씩을 두었다. 이러한 한족회의 자치조직은 1912년부터 조직되어 있었던 부민단(扶民團) 등의 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한족회의 지방자치는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박영산은 군정서(軍政署)·정의부(正義府)·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11일 반석현(磐石縣)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322면
- 동아일보(1931. 10. 22)
- 조선일보(1931. 10. 21)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