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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476
성명
한자 南錫仁
이명 南禹八, 南又八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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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77 훈격 독립장
1896년 산남의진 소집장(山南義陣召集將)으로 있다 의병이 해산되자 그후 10년간 여러 의장(義將)과 연락을 갖고 1906년에는 산남의장 정용기(鄭鏞基) 휘하에서 청송지방(靑松地方)군인 징발(軍人徵發)물자 수집(物資蒐集)의 책임을 맡았으며 1907년 정용기(鄭鏞基) 피체(被逮)정사홍(鄭士弘), 이운경(李雲景), 정천문(鄭千汶), 남석문(南錫文) 등과 출병 적 진위대(敵鎭衛隊)교전하였고 그후 재창의(再倡義)하여 적과 교전하다가 피체(被逮) 종신형을 언도받고 복역옥사(獄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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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남석인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으로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일제의 간섭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일본인을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기 위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때 영천 사람인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을 중심으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을 확정하고 있었다.

정용기 등은 국문으로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민중들에게 돌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각계 각층으로 보내어 의병에 입대할 것을 권유하였다.

정용기 의진에는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崔基輔)·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廈)·이창송(李蒼松) 등이 조직확대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각 지방별 모병 담당자가 구성되었다.

이때 남석인은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와 함께 청송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석인은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는데, 이미 정용기는 기밀이 누설되어 체포된 후였다.

다만 정용기의 사촌인 정사홍(鄭士弘)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거사준비를 하여 남석인은 정사홍과 경주 사람 이운경(李雲景)·흥해 사람 정천여(鄭千汝) 그리고 청송 사람으로서 남석인의 육촌 되는 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1906년 음력 4월 12일 출전하였다.

무기로는 각기 화승총 25자루를 휴대하였을 따름이다.

4월 13일 경주 하옥동(下玉洞)에 도착하고 이어서 영덕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미 경주 사람 이한주(李漢主)가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와서 절에 머물러 있었다.

본래 이한주는 정용기 의진의 중군이었으므로 합진할 것을 결정하고 부서를 다시 정하였다.

이때 남석인은 포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남석문은 좌익장, 정사홍은 우익장, 정천여는 소모장, 이한주는 중군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을 정비한 후 4월 26일에 의병 8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하였다.

그날 정오에 영덕 적암지(赤巖地)에 이르렀을 때 경주 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내습해 왔다. 역부족으로 의진을 해산하고 옥동(玉洞)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병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일시 영천의 김성찬(金聖贊)의 집에서 두 달여 간 머물다가 8월초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부친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의 주선으로 대구 경무청으로부터 풀려나게 된 정용기는 의거준비를 시작하였다.

1907년 5월 이들은 강원도 강릉에서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무기 등을 준비하였다.

기일이 다되자 정사홍이 남석인을 찾아와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남석인은 군사 30명을 모집하여 영천 거동사(巨洞寺)에 머물면서 의병장 정용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남석인은 의진을 거느리고 청송·흥해 등지의 민가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6월 정사홍과 뜻이 맞지 않으므로 포군 20명만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가을까지 그곳에서 유진할 생각이었으나 일군이 눈치채면 불리할까 염려하여 영덕 입암(立岩)으로 가서 포병을 모집하고자 청하(淸河) 하옥계(下玉溪)에 주둔하였다.

6월 19일 적의 공격을 받고 은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20일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 결과 종신 징역에 처해졌으나, 끝내 대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0·351·387면
  • 매천야록 43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42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석인 자 : 우팔(禹八), 이명 : 우팔(又八) 경상북도 청송(靑松) 1896년 감은리전투
본문
1878년 4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도평리(道坪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이며, 자는 우팔(禹八), 이명은 우팔(又八)이다. 임진왜란 때 남계조(南繼曺)가 청송에 입향한 이래 그 후손들이 현동면 일원에 거주하고 있었다. 현동면 출신 영양 남씨 15명이 산남(山南) 의병부대에 참여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1896년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남승하(南昇夏) 등과 함께 청송(靑松)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후 남석우(南錫佑)의 포군에서 종사(從事)로 활동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06년 3월 고종의 시종관 정환직(鄭煥直)의 아들 용기(鏞基)가 경북 영천에서 산남 의병부대를 일으키자, 청송지방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모병 활동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1906년 4월 산남 의병부대 대장 정용기가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에서 아버지 정환직이 붙잡혔다는,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편지에 속아 경주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정용기가 대구의 경상감영에 수감된 뒤, 영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용기의 사촌 정사홍(鄭士弘)이 거느린 의병 30여 명만 남아 있는 산남 의병부대에 들어가 부대의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 해 4월 12일 이운경(李雲景)·정천여(鄭千汝)·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출전하였다. 무기는 화승총 25자루를 휴대하였을 뿐이었다.1906년 4월 13일 경주 하옥동(下玉洞)을 거쳐, 영덕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산남 의병부대의 중군(中軍)이었던 이한구(李韓久)의 지휘를 받아 부서를 개편하였는데, 우익장(右翼將)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경주로 향해 진군하였다. 이날 정오에 영덕 적암(赤巖)에 도착하자 경주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습격하였다. 이에 영덕(盈德) 옥동(玉洞)으로 돌아와 수습된 의병을 해산하고, 향리 청송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각처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 찾아와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으므로 청송을 떠나 영천의 김성찬(金聖贊)의 집에 두 달여를 머물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한편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5월 산남 의병부대를 다시 일으켰다.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 의병부대는 서울 진공을 목표로 의병 부대를 재편성하고, 우선 관동(關東)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돌석부대(申乭石部隊)를 지원하며, 동해안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는 등 북상의 길을 찾고 있었다. 이때 정사홍이 청송으로 찾아와 다시 의병부대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1907년 5월 정사홍의 권고로 의병 30명을 모집하여 영천군 자양면(紫陽面) 보현리(普賢里)의 거동사(巨洞寺)로 갔다. 여기에서 의병장 정용기를 청해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아 결별하였다. 이후 정사홍과 함께 청송·흥해 등지를 전전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동년 6월 정사홍과도 뜻이 맞지 않아 다시 그와 결별하고 포군 20명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그리고 포군을 모집하기 위해 영일군 죽장면 입암(立巖)으로 들어가던 중, 1907년 6월 19일 순검을 만나 고향으로 피신하였는데, 6월 20일 청송에서 순검에게 붙잡혔다.1907년 9월 4일 경상북도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그 해 9월 15일 무기 은닉처를 추궁당하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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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징역종신 경북재판소 1906-09-04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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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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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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