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심성지 의진은 1896년 1월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儒林)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는데, 이때 김태진도 의진 편성과정에 참여하였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1896년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赤猿日記(毛筆草本)
- 晩悔堂遺稿(毛筆草本, 作成年度未詳) 62·6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