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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541
성명
한자 金震榮
이명 金海榮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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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7 훈격 애족장
1907. 4월 정용기(鄭鏞基) 의병장(義兵將)재거의(再擧義)하여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결성하자 입진(入陣)하여 장영서장(將營書掌)으로 입암 전투(立巖戰鬪)참전(參戰)하는 등 경북(慶北) 청하(淸河), 죽장(竹長), 청송(靑松)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해진(解陣)만주(滿洲)등지의 동지들과 연결하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는 등 활동(活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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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청송의진의 중군장을 역임한 부친 김대락(金大洛)의 기개를 이어받은 김진영은 국내 각처를 역방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경북 영천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을 결성한 바 있는 정용기 의병장은 1907년 4월 경북 북동산(北東山)에서 창의하여 산남의진을 재조직하였다. 이때 김진영도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장영서장(將營書掌)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김진영도 입암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진이 흩어짐에 따라 은신하였다. 이후 그는 재기를 모색하며 전국 각지를 순방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山南倡義誌(1946) 下卷 45·46面
  • 山南義陣遺史(1970) 468面
  • 義城金氏世譜(刊行年度未詳) 卷之一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90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진영 자 : 중옥(重玉), 호 : 벽초(碧樵), 이명 : 김해영(金海榮) 경상북도 청송(靑松) -
본문
1876년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안덕면(安德面) 신성리(薪城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중옥(重玉), 호는 벽초(碧樵), 이명은 김해영(金海榮)이다. 1896년 청송의병부대[(靑松義陣)]의 중군장(中軍將) 김대락(金大洛)의 아들이다. 1907년 산남의병부대[(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산남의병부대는 1906년 (음)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일으킨 의병부대이다. 산남의병부대가 영해(寧海) 방면으로 진군하던 중 1906년 4월 경주진위대의 간계에 속아 대장 정용기가 경상감영으로 잡혀갔다. 그 뒤 정용기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풀려나면서 1907년 4월 재기할 수 있었다. 이때 장영집사(將營執事)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1907년 (음)8월 25일 산남의병부대는 회의를 거쳐 9월 초 관동(關東)을 향하여 북상을 시작하였다. 정용기 대장은 본진 장졸 100여 명을 이끌고 진군하던 중 (음)9월 1일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巖)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밤을 새워 격전을 벌였으나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많은 장졸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니 이것이 입암전투이다.1907년 (음)9월 3일 아버지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남은 군사를 규합하여 진용을 재편성하였다. 이때 임창규(林昌圭)와 함께 군문집사(軍門執事)로 임명되었다. 의병부대는 청하(淸河)·흥해(興海)·청송(靑松)·영해(寧海)·영덕(盈德)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서울진공작전을 위한 북상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집요한 압박과 탄약마저 고갈된 상태에 처하여 대장은 개별적으로 북상하여 강원도에서 모이도록 지시하고 부대를 해산하였다. 그러나 정환직 대장마저 붙잡혀 1907년 (음)11월 영천 남교에서 총살 처형으로 사망하였다.1908년 (음)2월 최세윤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여 부대가 재정비되었다. 이후 부대는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을 계획하였다. 지역별로 책임자를 선정하여 각지에 배치하고 소부대 규모의 유격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때부터 청송의 동부 주왕산(周王山) 일대에서 활동하는 서종락(徐鍾洛) 부대에 속하여 활동하였다.1908년 7월 최세윤 대장이 장기(長鬐) 용동(龍洞)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10월 부대장 서종락도 붙잡혔다. 남은 부대의 항전도 1910년 고와실(高臥室)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함께 활동하던 의병들이 잡히거나 귀순하던 상황에서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 이주 뒤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수년간 옥고를 겪었다. 1921년 8월 23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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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청송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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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의정부)3ㆍ1운동 기념비 경기도 의정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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