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청송의진의 중군장을 역임한 부친 김대락(金大洛)의 기개를 이어받은 김진영은 국내 각처를 역방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경북 영천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을 결성한 바 있는 정용기 의병장은 1907년 4월 경북 북동산(北東山)에서 창의하여 산남의진을 재조직하였다. 이때 김진영도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장영서장(將營書掌)에 선임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위맹을 떨쳤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는 일본군 3명을 효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의 장령들이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김진영도 입암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진이 흩어짐에 따라 은신하였다. 이후 그는 재기를 모색하며 전국 각지를 순방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山南倡義誌(1946) 下卷 45·46面
- 山南義陣遺史(1970) 468面
- 義城金氏世譜(刊行年度未詳) 卷之一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90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