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06년 경북 진보군(眞寶郡)과 영양군(英陽郡) 일대에서 이하현의진(李夏鉉義陳)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경북지역의 신돌석(申乭石)은 아우 신우경(申友慶)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그 수가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신돌석의진은 진보의 이하현의진, 영덕(盈德)의 정용기의진(鄭鏞基義陳)과도 연락을 취하며 활동을 하였다. 1906년 3월 13일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활동하였다. 4월에 울진(蔚珍) 장흥관(長興館)에 이르러 일본군의 배 9척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原州)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김완이는 신돌석의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던 이하현의진에서 의병 30여 명과 함께 1906년 음력 2월부터 음력 4월 1일경까지 진보군과 영양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3년을 받고 공소했지만, 같은 해 7월 3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刑事控訴事件簿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권 496, 5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