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의병장 유시연(柳時淵)의 지휘하에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유시연은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 출신으로 1896년 1월 결성된 안동의진의 선봉장으로 태봉전투(胎峰戰鬪)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이나 김도현의진(金道鉉義陣)과 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봄 경주 분황사(分皇寺)에서 열린 열읍 의병 대표의 모임에서 영남의병대장(嶺南義兵大將)으로 추대되었다. 유시연은 1908년 여름까지 안동군 임동면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와 동부지역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이 때 유시연은 안동군 임동면 대곡리(大谷里) 출신의 의병장 박인화(朴仁和)가 이끄는 박처사의진(朴處士義陣)과 영덕의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 그리고 영양의 김성운의진(金成雲義陣) 등과 연결하여 일본군 토벌대를 공략하는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1908년 2월 28일 임동군 대전(大田)에서 일본군 토벌대에게 패한 후, 1908년 5월경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2년 유시연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1913년 8월 영주에서 체포되었다.
김두진은 1913년 5·6월 조박용(趙博容)·구석규(具錫圭)·유명호(柳命鎬) 등과 함께 안동·영양 일원에서 만주로 망명했다가 국내로 잠입한 의병장 유시연의 지휘하에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1913년 9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13. 9. 15)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2권, 293면
- 每日申報(1913. 8. 3,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