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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247
성명
한자 金大洛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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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7 훈격 건국포장
1896.1월 경북(慶北) 청송(靑松)에서 거의(擧義)심성지 의진(沈誠之義陣)에 참여하여 참모(參謀)중군장(中軍將)으로 동년 4월 김하락 의진(金河洛義陣), 김상종 의진(金象鍾義陣)과 연계하여 감은산록(甘隱山麓)에서 적군과 교전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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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김대락은 이와 같은 시기에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생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는데 그는 처음 의진의 참모를 맡았으나 곧이어 전투편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같은 해 3월 20일 군사를 이끌고 광주(廣州)의진과 연계활동을 도모하는 등 군사활동에 나섰다. 이윽고 1896년 4월 2일 그가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이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赤猿日記(毛筆草本)
  • 山南倡義誌(1946) 下卷 45·46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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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대락 자 : 학원(學源), 호 : 만송(晩松) 경상북도 청송(靑松) -
본문
1851년경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안덕면(安德面) 신성리(薪城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학원(學源), 호는 만송(晩松)이다. 1896년 3월 12일 청송 향교(鄕校)에서 유림 200여 명과 함께 창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沈誠之)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년 3월 15일 처음 이른바 청송의병부대(靑松義陣)가 편성될 때 참모(參謀)로 선임되었으나, 3월 21일 진용이 보강될 때는 중군장(中軍將)으로 중용되었다. 이후 1896년 4월 29일 의병부대 편제가 완비되면서 대장 심성지를 중심으로 부장 조성박(趙性璞)·좌익장(左翼將) 김상길(金相吉)·우익장(右翼將) 남두희(南斗熙)·전방장 윤정우(尹楨禹)·후방장 장무호(蔣武鎬)·사병도총 남승철(南昇喆)·소모장 심능장(沈能璋)·선봉장 홍병태(洪秉泰)·의영도지휘사 서효원(徐孝源) 등과 함께 지휘부를 이루고 의병부대를 이끌어갔다. 1896년 5월 14일 의병부대의 주력부대인 포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김상종(金象鍾)의 의성의병부대(義城義陣) 및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병부대(利川義陣)과 호응하여 청송 안덕면 감은리(甘隱里)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관군은 물러나면서 마을을 불태웠다. 이튿날 오후 불탄 감은리 마을을 위로하고 군문집사 박봉의(朴鳳儀)를 보내 안덕면 신시장에 주둔하던 이천의병부대와 의성의병부대에 네 동의 술로 위무하였다. 1896년 5월 22일 좌익장 권성하(權成夏)로 하여금 포군(砲軍) 3초(硝)를 이끌고 영덕의병부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5월 25일 관군의 추격과 고종(高宗)의 의병 해산 칙유(勅諭)에 따라 부대 해산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의병을 해산하는 것처럼 하면서 안으로는 분진(分陣)하여 대응할 계책이었다. 분진 결의에 따라 현북(縣北)을 맡고, 부장 조성박은 현내(縣內), 사병도총 남승철은 현동(縣東)과 현남(縣南), 선봉장 홍병태는 현서(縣西),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은 부동(府東), 좌익장 권성하는 부내(府內), 소모장 심능장은 부서(府西)를 맡아 각각 이속과 서기 1인을 두었다. 면군(面郡) 중심의 분진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분진체제 속에서 1896년 6월 15일 이천의병부대·의성의병부대와 함께 경주연합의병부대(慶州聯合義陣)를 결성하여 6월 18일 경주성(慶州城) 전투에 참가하였다. 또 6월 28일 영덕으로 진출한 김하락의병부대와 합세하여 7월 14일 영덕전투와 7월 20일 부동면(府東面) 상평리(上坪里) 뒷산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 등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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