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김대락은 이와 같은 시기에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생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는데 그는 처음 의진의 참모를 맡았으나 곧이어 전투편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같은 해 3월 20일 군사를 이끌고 광주(廣州)의진과 연계활동을 도모하는 등 군사활동에 나섰다. 이윽고 1896년 4월 2일 그가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그러나 이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赤猿日記(毛筆草本)
- 山南倡義誌(1946) 下卷 45·46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