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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253
성명
한자 權鐸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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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7 훈격 건국포장
1896.1월 경북(慶北) 청송(靑松)에서 거의(擧義)심성지 의진(沈誠之義陣)에 참여하여 백의종사(白衣從事)로서 동년 4월 김하락 의진(金河洛義陣), 김상종 의진(金象鍾義陣)과 연계하여 감은산록(甘隱山麓)에서 적군과 교전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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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는 등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권탁수는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생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그는 의진편성 당시 백의종사(白衣從事)로 선임되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 해 4월 2일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赤猿日記(毛筆草本)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탁수 - 경북 청송(靑松) 전기의병(심성지 의진)
본문
1835년경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안덕면(安德面) 석정(石井)에서 출생하였다. 재야 유생 출신으로 청송에서 심성지(沈誠之)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우익장(右翼將)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으로 의병들의 창의가 전국 각처에서 이어졌다. 이후 고종은 1896년 1월 27일부터 「애통조(哀痛詔)」를 반포하였고, 이는 의병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당시 청송 지역은 주변 각 군의 의병부대에서 발하는 통문과 격문이 날아들고 있었지만 창의는 늦은 편이었다. 국왕의 「애통조」가 고향인 청송에도 전해지면서 민심이 술렁이는 와중에 청량산(淸凉山) 의병부대의 「청량격문(淸凉檄文)」과 안동(安東) 의병부대의 「화산격유(花山格諭)」가 도착하였다. 안동 의병부대가 안동부를 점령하자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달아났고, 청송군수 남유희(南有熙) 역시 도망하였다. 1896년 안동의병의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으로 들어와서 인근 지역은 의병을 일으킨 지 오래되었는데 이곳은 아직 거병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청송 지역의 군기를 취합해 가려고 하자 자극을 받은 이 지역 유생들은 의병 결성을 모색하는 향회(鄕會)를 개최하게 되었다. 청송군 각 면에서 100여 명의 유생이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부동면(府東面) 상평(上坪)의 서효원(徐孝源)은 각 면으로 「효유문(曉諭文)」을 발하여 나라와 고을을 수호하자는 명분으로 의병소를 설치하고 창의하였다. 심성지를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해나가면서 의병의 모집과 훈련, 군량미와 군수품의 수집을 추진하였다. 그뿐 아니라 주변 군현에서 결성된 여러 의병부대와 정보를 주고받았고 나아가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전투 의병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심성지 의병부대는 청송군수가 도망한 상태에서 청송군의 행정조직을 장악하였다. 의병부대가 청송의 치안까지 담당하면서 향리들도 의연금을 납부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이것은 심성지 의병부대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이 청송 지역의 유지였던 것에서도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성지 부대의 인물들은 지역적 연고 위에서 혈연과 학연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가문들이 덕천(德川)의 청송 심씨, 안덕(安德)의 함안(咸安) 조씨, 화목(和睦)의 의성(義城) 김씨, 부동(府東)의 달성(達城) 서씨, 현동(縣東)의 영양(寧陽) 남씨, 부내(府內)의 파평(坡平) 윤씨, 안덕면 석정의 안동 권씨 등이다. 안동 권씨로서 권성하(權成夏)와 함께 우익장으로 심성지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심성지 부대는 창의 후 주변의 안동·선성(宣城)·진보(眞寶)·영양·의성·영천(榮川)·영덕(盈德) 의병부대에서 격문을 접수하거나 통문을 수발하는 등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연합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하락(金河洛) 의병부대가 의성으로 들어오자 청송에서 의성·청송·이천(泥川) 세 지역 의병의 의성 연합 의병을 성립하였다. 의성 연합 의병은 안덕면 감은리(甘隱里) 상황현(城隍峴)에서 관군 170명과 교전하여 1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관군은 의병 탄압을 명목으로 감은리에 방화를 하였고, 의성 연합 의병은 회군하여 이천의 2대와 청송의 본진을 파수하고 모두 물러나 유숙하였다. 이어 경주성·영덕 등지의 여러 전투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효유조칙(曉諭詔勅)」이 발표되자 의병부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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