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황해 금천(金川) 사람이다.
일찍부터 철원(鐵原)에서 성장한 그는 기독교 전도사로서 선교활동을 펴는 한편 한의학(韓醫學)을전공하여 약종상(藥種商)을 겸하기도 했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에는 철원의 봉명학교(鳳鳴學校)와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구국 교육활동을 벌였다. 당시 배영학교는 군사교육까지 실시하던 민립학교였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됨에 따라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 뒤 서울의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선교사업을 폈고, 다시 금천(金川)등지의 황해도 일대와 철원 등 각지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폈다.
한편으로 그는 항일운동의 방법으로서 조선인관리퇴직동맹(朝鮮人官吏退職同盟)을 추진하기 위해 일단 이에 필요한 재정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8월 21일 배영학교 시절부터 같이 활동했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서무국장 강대려(姜大呂)로부터 대한독립애국단의 설치 사정을 접하고, 동단에 가입하여 강원도 각군에 군단(郡團)을 설치하는 책임을 맡았다.
1919년 5월 신현구(申鉉九)가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지원단체로서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 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단에서는 임시정부를 중심 한 독립운동의 선전과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는 평소 강원도 전역의 기독교 인사들과 지면이 넓은 것을 활용하여 원주(原州)·횡성(橫城)·강릉(江陵)·양양(襄陽)·금화(金化) 등지를 순회하며 동단의 조직확대를 위해 힘을 쏟았고, 그 결과 강원도 각처에 동단의 지단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20년 1월 동단의 강원도단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22년 7월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91·993∼995·1001∼1003·1005∼1007·1010·1012∼1015·1024·1028·102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5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53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6면
- 판결문(1920. 12. 23 경성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