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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朴容萬
이명 朴容弼, 朴容晩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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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대통령장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참가, 활동하였고, 1904년 (輔)((保))안회(安會) 간부로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1908.7월 미국 덴버시에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를 열었으며, 1910년 6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열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고, 1911년 『신한민보(新韓民報)』주필, 1912년 『신한국보(新韓國報)』주필로 활동하였으며, 1912.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 북미지방총회대표로 참가, 외교원에 선임되었고, 1914.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결성,단장(團長)으로 사관학교를 운영하였고,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小弱國同盟會)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1919.3월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태평양시사」를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외무총장(外務總長)에 선임되었고, 1921년 중국(中國) 북경(北京)에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개최를 주도하고 1922년 천진(天津)에서 대일무력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으며, 1923년 상해(上海)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창조파(創造派)로서 활동하면서 1924년 창조파 중심의 인사들이 설립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비서처(秘書處) 비서장(秘書長)에 선임되는등 독립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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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숙부인 박희병(朴羲秉) 슬하에서 성장한 그는 서울에서 관립 일본어학교를 졸업한 후, 1895년경 일본유학시험에 합격, 도일(渡日)하여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 졸업 후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숙부의 소개로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을 갖게 되면서 활빈당(活貧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안국선(安國善)·오인영 등과 함께 귀국하다가 이른바 '활빈당사건(活貧黨事件)'으로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숙부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수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독립협회(獨立協會)·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보안회(輔安會)에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던 중 1904년 7월 일제의 '황무지개척권(荒蕪地開拓權)' 반대 투쟁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어 제2차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때 옥중에서 정순만(鄭淳萬)·이승만(李承晩)과 만나 결의형제를 맺으면서 이른바 '삼만'으로 불리게 되었다. 출옥 후 숙부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사립 시무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국어·일어·산술·중국고전 등을 가르치던 중, 그 곳에서 후일 미국 내에서 군사활동을 함께 하게 되는 정한경(鄭翰景)·유일한(柳一韓) 등을 만났다. 그러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러일전쟁 등으로 이미 한국이 망국사태임을 간파한 그는 해외로 나가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항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꾀하기 위해 1905년 해외망명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1905년 2월 이승만의 아들 태선(泰善)·정순만의 양필(良弼)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도미 후 1906년경 그의 숙부 박장현(朴章鉉)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유일한·정한경·정양필을, 그리고 이종희·이희경·김용대(金容大)를 링컨시의 학교에, 김병희(金丙熙)·권종호(權鍾浩)·정영기(鄭永基)·조진찬(曺鎭贊) 등을 링컨시에 취역시켰다. 이러한 그의 구획은 이후 1910년대 한인 유학생의 절대 다수가 네브라스카주에 집중되었던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여 1911년 당시 미국내 한인 대학생의 80%가 네브라스카주 주변에 집중되었다. 1907년 숙부와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로 옮긴 그는 콜로라도 예비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한인 동포들을 위해 여관과 직업주선소를 운영하였으며, 1908년 1월에는 덴버 근처의 한인 유지들과 논의하여 해외동포대표회의(海外同胞代表會議)를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동년 5월 박처후(朴處厚)·임동식(林東植)·정한경 등과 함께 해외 한인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뒤,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이들과 함께 무장투쟁의 원동력인 한인 청년들의 군사양성기관을 설립하기로 협의하고 이를 대표자회의에 붙일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08년 7월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자회의(北美大韓人愛國同志代表者會議)'를 개최하여 '한인군사학교(韓人軍事學校)' 설립안을 제출·통과시킨 그는 1908년 12월 네브라스카 주정부의 허락을 얻어 1909년 6월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1910년 4월 헤이스팅스대학과 교섭 끝에 그 학교의 건물 한 동을 임대하고 전장(田莊)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군사학교 운영에 주력하던 즈음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부터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초빙되자, 1911년 2월 초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하였다. 취임 후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인 임시정부(臨時政府)로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3월 '조선민족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해외 한인을 통일하고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정치적으로 여기에 복종시켜 무형국가(無形國家) 또는 가정부(假政府)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을 비롯하여 석달에 걸쳐 임시정부 조직론인 '무형국가론(無形國家論)'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헌법 개정안 기초 위원으로 선정된 그는 결성선포문을 기초하여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탄생시켰다. 1911년 11월 초 주필 자리를 내놓고 네브라스카대학으로 돌아가 정치학 학사학위를 획득한 그는 이듬해인 1912년 11월 중앙총회 제1차 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신한국보(新韓國報)』 주필로 초빙되어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또한 이 시기 그는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과 『군인수지(軍人須知)』라는 무장항쟁론에 관한 저서를 간행하여 그의 관심을 일반에 널리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911년부터 1912년 사이 국민회의 조직은 시베리아·만주지방 등에 116개의 지방회가 건설될 정도로 확산되었으며, 그의 임시정부조직론에 힘입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의 유일무이한 조직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1912년 12월 하와이에 도착한 그는 북미대륙에 있을 당시 그가 주장하던 의무금제도와 자치제도를 하와이에서도 실현시키기 위해 하와이 동포들의 협조로 의무금제도를 확립시켰으며, 동년 5월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하와이 각 섬에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하여 한인자치제를 확립하고 해외 한인을 일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일본정부의 간섭을 배제하여 망명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민개병을 통한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1914년 6월 미국군대를 모방한 근대적 군사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창설하고 둔병제식(屯兵制式) 훈련제도를 도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전담부대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1913년 2월 그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여 한인들의 교육과 출판사업을 맡은 이승만(李承晩)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5년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고 박용만 계열의 대의원을 구타하는 등 그에 대한 음해공작과 테러행위를 자행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가 하와이 정부로부터 승인받은 특별경찰권은 취소당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은 상실되었고, 대조선국민군단도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문을 닫게 되는 등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당선될 정도로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15년 6월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1916년 이승만이 그를 「국민보(國民報)」 주필로 재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의(弱小國同盟會議)'에 한국 대표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1917년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를 닦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918년 2월 이승만은, 그가 미국영토 내에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설립하여 일본군함인 출운호(出雲號)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 한다면서, 미·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국제평화를 저해하는 음모행위이므로 미국 내에서 그의 군사활동을 금지시키라고 요청하는 등 정치적 음해공작을 또 다시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미국당국으로부터 스파이로 몰려 법정에까지 서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본격적인 무장투쟁 준비에 나선 그는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번역하여 호놀룰루의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지에 보내는 한편, 3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국내 및 중국 등지의 독립군단과 통일을 꾀하기 위한 통일군사정부인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하와이지부를 창설하였다. 이와 함께 동년 4월 한성임시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外務總長)에 피선된 그는 그해 5월 연해주에 도착하여 이민복(李敏馥)·조성환(曺成煥)·백 준(白準) 등 간도·길림지방의 독립군들과 더불어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고 총참모로 취임하였다. 또한 1920년 봄 대동단(大同團) 총부(總部) 무정부장(武政部長)으로 임명되기도 한 그는 문창범(文昌範)·유동열(柳東說)·신채호(申采浩) 등과 회합하여 노령·만주지역의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조직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한편, 동년 1920년 여름 모스크바로 가서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의 이름으로 '소련의 노농정부(勞農政府)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호 연합하여 노농정부는 임시정부의 독립군 양성 승인과 무기를 공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노농정부의 지휘를 받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밀약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밀약의 일환으로 화아선(華俄鮮) 즉 중국·러시아·조선 연합선전부가 결성되자, 화아선 연합선전부 부부장의 직위를 맡은 그는 1920년 12월 초 특사를 니콜리스크에 파견,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과 회견하여 연합선전부 간도지부를 설립키로 협의케 하였다. 그 결과 선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에 홍범도(洪範圖)를 임명하고 사령부를 돈화현(敦化縣)에 두어 간도주재 일본군경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만주의 군사단체들이 통일된 지도체가 없고, 상해 임정 역시 세력이 약해진 관계로 이들을 지도할 역량이 부재하다는 판단 아래 1921년 4월 신채호·신 숙(申肅) 등과 북경 근방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노령의 통일된 독립군부대는 후일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만주의 부대들은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국경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진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결의했다 한다. 그러나 군사통일회의 결성이 재정 부족으로 실패한 것을 깨달은 그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자금 마련과 기지 확보를 위해 흥화은행(興華銀行)을 설립하고 이 은행의 신용을 담보로 북경과 만주 방면의 토지를 구입하여 각지에 산재한 군인들을 집결·훈련시켜 군사단체를 통일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1925년 하와이로 가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1926년 6월 중국 북경으로 돌아와서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북경 근방의 땅을 구매하여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를 설립하고 수전(水田)과 정미소를 경영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28년 10월 17일 북경에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 오해를 받고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28. 10. 27) ·신동아(1979. 9월호, 청년 이승만 자서전) 434면
  • 공립신보(1908. 3. 4)
  • 대동공보(1908. 2. 27)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0·84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13·15·84·87·89·95·13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18·522·734·737·742·756·757·770·77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44·368·455면
  •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 1989) 1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2·124·1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322·32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146·206·210·218·220·428·6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694·788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0·20·39·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327·347·349·370~372·415·712면
  • 한국학연구(인하대, 1991) 제3집 별집,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정두옥, 1969)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673·689·697·699·716~718·720·762·800·801·808·856·86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92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2권 807·84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20·477·480·483·489·1081면
  • 박은식전서 상권 565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61·96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10·11·34·143·148·150·275·330·411·516면
  •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28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53·72·125·127·139·154·155·171·172·219·220·238·319·366·4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357·53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3·800면
  • 독립운동가열전(한국일보사, 1989) 190~19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2집 39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12·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81·17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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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용만 호 우성(又醒), 이명 한상량(韓相良) 강원 철원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애국동지대표회의, 대동단결선언 발표
본문
1881년(고종 18) 윤(閏) 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西邊面, 철원읍) 중리(中里) 109번지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호는 우성(又醒)이며, 충헌공(忠憲公) 양산공파(楊山公派) 15세 손이다. 충헌공은 고려 충선왕으로부터 시호를 받은 박척(朴陟)이며, 양산공은 충헌공의 10세손 박언성(朴彦誠)이다. 어릴 적부터 괄괄하고 적극적인 성품을 보였고, 한문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13세 되던 1893~4년경 10살 터울의 숙부 박희병(朴羲秉)을 따라 상경하여 1년간 한성일어학교(漢城日語學校)를 다녔다. 이때부터 12~3년간 숙부와 함께 생활하면서 박희병의 개화사상과 문명개화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숙부의 호인 ‘성촌(醒村)’의 ‘성’자를 따서 호를 지을 정도로 숙부를 닮고 싶어 했다. 1895년 관립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숙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김현구(金鉉九)의 『우성유전(又醒遺傳)』에는 중학 졸업 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고 하나, 졸업생 명단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 유학 시절, 숙부의 소개로 망명 중인 박영효(朴泳孝) 등을 소개받아 활빈당(活貧黨)과 관련을 맺었다. 이 일로 1901년 3월 안국선(安國善), 오인영(吳仁榮) 등과 귀국 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중국의 계몽운동가 량치차오(梁啓超)에게 심취하여 ‘조선의 량치차오’가 될 것을 선언하였다. 박희병과 선교사의 도움으로 수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난 뒤, 1903년 9월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다정국장으로 선임되어 회원관리 임무를 맡았으며, 1904년 9월에는 통신국장을 맡아 회원 연락과 서기 임무를 맡았다.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중 보안회(輔安會)에서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을 벌이자, 함께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2차 옥살이를 하였다. 이때 감옥에서 이승만(李承晩), 정순만(鄭淳萬)을 만나 결의형제를 하였는데, 후일 3인의 이름 끝 자인 ‘만’을 따 ‘3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차 옥살이 후 숙부가 근무하던 평남 순천의 시무학교(時務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만난 제자가 후일 미국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할 때 함께했던 유일한(柳一韓), 정한경(鄭翰景, Henry Chung), 이종희(李鍾熙), 이희경(李喜儆), 이종철(李鍾徹), 유은상(柳殷相) 등이었고, 의형제 정순만의 장남 정양필(鄭良弼, 본명 鄭忠模)도 그 중 하나다. 1904년 상동청년회의 도움으로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이승만의 아들 이태산(李泰山, 일명 鳳秀)과 정양필도 동행하였다. 190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자, 곧 바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가서 옥중 동지였던 신흥우(申興雨)를 만나 고학방법 등을 의논하였다. 그 후 오클랜드(Oakland)로 가서 문양목(文讓穆), 백일규(白一圭) 등과 교분을 쌓는 등 반년 간 캘리포니아 일대에 머물며 미국 서부지역 동양인 노동자시장을 살펴보았다. 1905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북감리교 연회(年會)에서 안정수(安定洙)와 함께 한인전도사로 임명되었다. 9월 27일 박희병이 멕시코 한인이민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셋이 함께 미국 네브라스카주로 떠났다. 숙부와 함께 네브라스카주 커니(Kearney)에 정착한 뒤 한인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철도회사와 교섭하여 일자리를 얻어내는 한편 이종희, 이희경, 김용대(金容大, 후일 金一信)를 링컨시 소재 학교에 입학시키고 김용대의 아버지 김병희(金丙熙), 권종호(權鍾浩), 정영기(鄭永基), 조진찬(曺鎭贊) 등 장년층을 링컨시 동남부에 위치한 테이블 록(Table Rock)의 철도공사장에 취직시켰다. 또한 커니시 유지들에게 한인 학생들을 ‘스쿨보이(school boy)’로 채용해 줄 것을 권유하여 정한경, 정양필, 유일한, 이관수 등 어린 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1906년 2월 멕시코 한인 참상을 조사하고 돌아온 숙부와 함께 그해 여름 콜로라도주 덴버(Denver)로 이주하였다. 덴버에서도 숙부와 함께 노동 주선소와 여관을 운영하면서 하와이에서 건너온 한인들에게 숙소와 취직을 제공 ・ 알선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인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청년들을 규합한 결과 1913년경 미주 한인 유학생 150여 명 중 60여 명이 네브라스카와 그 주변에 집중되었다. 1907년 6월 10일 숙부 박희병이 덴버에서 위암으로 사망한 뒤 콜로라도예비학교(Colorado Preparatory School)에 입학하였으며, 홀로 여관과 노동 주선소를 운영하였다. 1908년 1월 1월 덴버지역 한인들과 임시회를 열어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기로 의결하고 취지서를 작성하여 북미와 하와이, 러시아 한인단체에 대표 파견을 요청하였다. 7월 11일 덴버의 그레이스감리교회에서 애국동지대표회가 개최되었다. 4일간 열린 이 회의에는 박용만을 비롯하여 이승만, 이상설(李相卨) 등 국내외 대표 36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내외 통일기관 조직, 각지에 통신국 설치 및 연락 등을 의결하였고, 둔전병제(屯田兵制)에 입각한 군사학교 설립 안을 통과시켰다. 애국동지대표회를 마친 후 1908년 가을학기에 네브라스카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 입학하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던 노동 주선소 겸 여관을 윤병구(尹炳求)에게 위탁하였다. 9월 네브라스카대학에 입학한 그는 그해 겨울 박처후(朴處厚), 임동식(林東植)과 한인군사학교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고 모든 일을 박처후와 임동식에게 맡겼다. 이에 박처후, 임동식은 커니시에 농장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기숙할 곳을 정하고 미 육군이 사용하던 헌 군용 총을 사들였다. 농장경영자로는 조진찬을 초빙하였다. 그는 정한경과 함께 네브라스카주정부와 커니지방청과 교섭하여 군사학교 설립 인가를 얻자, 1909년 6월 초순 커니시 한 농장에서 해외 최초의 독립군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하였다. 또한 네브라스카 대한인거류민회도 설립하여 네브라스카 한인들을 결속시키고 소년병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10년 4월 1일 소년병학교가 헤이스팅스대학 내로 이전하자 그해 6월부터 2개월간 소년병학교 재정 모금 차 캘리포니아주를 순회하였다. 이때 재미 한인의 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사장 최정익(崔正益)을 만나 신한민보 주필직을 수락하였다. 1911년 1월경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문양목이 링컨에 있던 자신을 찾아와 대한인국민회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자 승낙하였다. 이에 네브라스카대학 봄학기를 휴학하고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신한민보』  주필로 부임 후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중앙총회 설립이었다. 그 일환으로 먼저 ‘무형국가론(無形國家論)’을 제기하였다. ‘무형국가’란 임시정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형국가론’이 반대에 부닥치자 방향을 전환하여 중앙총회를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인소년병학교 업무 관계로 1911년 6월 네브라스카주로 돌아와 주필과 중앙총회 설립문제, 소년병학교 업무 등을 주관하였다. 8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발족되자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에 걸맞은 헌장 초안을 기초하고 9월 초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대표회에 제출하였다. 이때 대한인국민회에서 멕시코 한인의 하와이 이주문제를 박용만에게 위임하자, 이주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주필직을 사임하였다. 1912년 1월 워싱턴에서 미국 상공부장관을 만나 멕시코 한인의 하와이 이주문제에 관해 회담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네브라스카로 돌아와 한인소년병학교를 관장하는 한편 학업을 계속하여 1912년 8월 네브라스카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손정도(孫貞道)에게 서신을 보내 『만주식민책(滿洲植民策)』에 관해 논의하는 한편 동삼성(東三省)의 이동녕(李東寧), 정영택(鄭永澤) 등 여러 독립운동가와도 서신 교류를 요청하는 등 만주에 둔전병제에 입각한 독립군기지 건설을 모색하였다. 1912년 11월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의회가 개최되자 중앙총회 외교원이자 헌장수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을 기초하여 11월 20일 선포식을 거행함으로써 사실상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해외 한인의 대표기관임과 동시에 대한제국을 대신할 민주주의 국가로 발흥한 것을 선언하였다.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의회가 끝난 후, 헌장 수정위원으로 함께 일했던 하와이 대표 박상하로부터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新韓國報)』 주필로 일해 줄 것을 권유받자 승낙하였다. 1912년 11월 30일 박상하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2월 6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1913년 하와이지방총회장에 당선된 박상하의 후원하에 하와이 한인 자치제도를 실현하고자 1913년 1월 27일 새롭게 자치규정 6장 155조를 기초하여 발표하였다. 또한 5월에는 정칠래, 홍인표, 박원걸, 박승준 등과 함께 청원하여 하와이주정부로부터 하와이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특별경찰권까지 허락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하와이 각 섬에 국민회 경찰부장을 두었고, 하와이 법정에서도 국민회의 경찰조사와 초심을 법정행사로 인정할 만큼 자치제도를 확립하였다. 자치제도 확립 후 그는 국민의무금제도를 시행하여 재정을 확보한 뒤 활발한 사업을 펼쳤다. 8월에는 기관지 『신신한국보』를 『신국민보(國民報』)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었으며, 1914년 6월에는 하와이군사령부로부터 설립인가를 얻어 오아후(Oahu) 카할루우(Kahaluu)에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또한 국민회의 숙원이었던 하와이지방총회관과 한인중앙학원의 건축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15년부터 이승만이 하와이지방총회를 사실상 장악하자, 국민보사와 농상주식회사 재산 전부를 하와이지방총회에 넘겨주었다. 더욱이 1915년 여름 연합국 일원이던 일본이 미국 국무장관에게 대조선국민군단의 군사훈련 중지를 강력히 요청하자, 대조선국민군단마저 1917년경 폐쇄되는 등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서서히 세를 잃어갔다. 1915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선거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자 취임식 참석차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머물다 8월 중순 하와이로 돌아왔다. 이즈음부터 이회영(李會榮)을 비롯한 상하이에서 결성된 동제사(同濟社) 인사들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국내와 상하이, 서북간도 등지에 독립운동기관 조직을 결성하고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추진하여 1917년 7월 발기자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1917년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뉴욕 맥알핀호텔에서 개최된 제1차 소약속국동맹회(The League of Small and Subject Nationalities)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1917년 이승만이 하와이지방총회를 사유화하고 재정을 남용하자, 이에 반발한 박용만 지지세력은 정확한 조사를 촉구하기 위해 1918년 7월 이른바 ‘갈리히연합회’로 불리는 하와이국민회임시중앙연합회를 조직하고 11월에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3 ・ 1운동이 일어날 것을 전해 듣자, 3월 3일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자유교회에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하와이지부를 조직하였다. 이어 『대한독립선언서(일명 戊午獨立宣言書)』를 번역하여 『Declaration of Independence by National Assembly of the Korean National Independence League』라는 영문제목으로 호놀룰루의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지에 게재하였다. 3월 30일에는 대조선독립단(Korean National Independence League) 하와이지부 선포식을 정식으로 거행하였다.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한성임시정부에서도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5월 17일 미국 육군 운송함 토마스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7월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후 한상량(韓相良)으로 이름을 바꾸고 미국 시베리아원정군사령부를 찾아가 정보를 제공하였다. 또한 한인신보(韓人新報)에 관여하면서 미군과 연락을 주고받던 김현토(金顯土, 본명 김현세)와 이종익(李鍾翼)을 만났다. 이들의 소개로 8월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조성환(曹成煥), 이민복(李敏馥), 백준(白準), 박상환(朴祥煥), 이승복(李昇馥), 김병희(金炳僖) 등을 만나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국민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총사령에 조성환, 자신은 총참모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내의 김성수(金性洙)와 민영달(閔泳達)에게 서신을 보내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활성화 계획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을 위해 이승복, 김병희, 박상환 등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체포되는 바람에 김성수와 민영달의 연해주 망명과 군자금 모집계획은 실패하였다. 1919년 9월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동휘(李東輝) 등을 만나 하와이 대조선독립단을 비롯하여 국내 및 해외 각지에 국민군을 확대 ・ 조직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였다. 그 일환으로 먼저 평안북도 태천(泰川)에 국민군을 조직하려 했으나, 1920년 2월 말 조직이 발각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1919년 11월에는 독립군기지 개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김규흥(金奎興, 일명 金復), 중국의 첸지옹밍(陳炯明) 등과 한중 합작으로 흥국실업은행(興國實業銀行)을 발기하였다. 1920년 봄 베이징으로 건너가 김가진(金嘉鎭)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의 무정부장(武政部長)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3월 박용만이 외무총장에 취임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자, 3월 29일 상하이에 도착 후 4월 초순 외무총장직을 사임하였다. 임시정부는 4월 19일 국무원 회의를 열고 그를 의원면직시켰다. 4월 중순, 문창범(文昌範)을 만나 군사단체 통일과 항일무장투쟁 전개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때 대동단 상무부장 나창헌(羅昌憲)도 박용만에게 러시아로 가서 활동할 것을 권유하자, 5월 러시아를 향해 베이징을 출발하였다. 이때 신채호(申采浩), 유동열(柳東說), 김영학(金永學)이 동행하였다. 6월 러시아 포크라니치나야에 도착하여 문창범, 김영학, 김하석, 고창일(高昌一) 등 대한국민의회 인사를 비롯하여 신채호, 유동열 등과 함께 무기 및 탄약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바이칼호 서쪽의 이르쿠츠크와 톰스크 중간지대에 국민군을 조직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러시아에서 국민군단 설립계획이 실패하자,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7월 극동공화국 전권위원 유린을 만났다. 그해 말 한형권(韓馨權)이 러시아정부와 맺은 비밀협약에 의해 한국, 러시아, 중국 3국간에 연합선전부가 조직되자, 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는 베이징에서 국내를 비롯한 서북간도 ・ 러시아 한인대표를 소집하여 군사통일촉성회를 개최하였다. 12월 초순에는 연합선전부 부부장 자격으로 한알렉산드르와 김하석(金夏錫)을 니콜리스크로 파견하여 안정근(安定根), 왕삼덕(王三德)과 만나 지부 설치를 협의하게 하였다. 이에 동령현(東寧縣) 삼차구(三岔溝) 상촌 고려촌에 간도지부를 설치하고, 왕청현(旺淸縣) 나자구(羅子溝)와 돈화현(敦化縣) 냉수천자(冷水川子)에 분파소를 설치하였다. 1921년 1월 연합선전부 부장 유린과 만나 국내로 위원 파견을 계획하는 한편, 블라고베시첸스크(黑河)로 이동하던 이동휘, 시베리아의 문창범, 그리고 조성환 등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그는 이동휘의 한인공산당, 문창범의 대한국민의회, 만주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베이징에 만주독립군총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2월 하순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 문창범, 신채호, 조성환 등 러시아 각지 한인 대표자 100여 명과 모임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한족공산당을 설치하고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는 한인 빨치산을 규합하여 간도로 남하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위로 끝났다. 3월 러시아 공산주의자 극동위원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그해 4월까지 신숙(申肅)과 함께 이동휘 계열의 한족공산당 소속 박진순, 김립과 수차례 만나 재정 지원과 군사단체 통일문제를 논의하였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1921년 4월 17일 임시정부를 제외한 만주지역 군사단체를 통일하는 군정부를 만들기 위해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국내를 비롯한 하와이 ・ 북간도 ・ 서간도 ・ 러시아 등지에서 10개 단체 대표 17명이 참석하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임시의정원을 모두 불승인하였다. 또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조선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천명하였다. 군사통일회 참여 인사들은 1921년 11월 베이징에서 대통령에 이상룡(李相龍), 국무총리 신숙, 외무총장 장건상(張健相), 학무총장 한진산(韓震山), 내무총장 김대지(金大池), 재무총장 김갑(金甲), 군무총장 배달무(裵達武), 교통총장 박용만을 선출하여 발표하였으나, 정식 발족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함께 베이징에서 신채호, 김창숙(金昌淑), 조성환, 노백린, 서왈보(徐曰甫) 등과 제2차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하였다. 보합단은 대한민국군정부(軍政府)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기에 단장은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할 것을 단칙으로 정하였다. 행정 각부는 단장 박용만, 군임장(軍任長) 노백린, 재임장(財任長) 김창숙, 내임장(內任長) 신채호, 사령관 김좌진 등이었다. 이들은 국내외 각지에 중한호조단(中韓互助團) 결성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도쿄, 서울, 대구, 부산, 함흥, 안동 등지에 공작원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국내와 미주로부터 자금 모집이 여의치 않자, 7월과 11월 러시아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으려 하였으나, 러시아정부의 지원 불이행으로 실패하였다. 1921년 말에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포고문을 인쇄하여 북만주와 상하이에 발송하였다. 1922년 이후부터는 둔전병제에 입각한 독립군기지 개척과 중국군벌과 연계한 독립투쟁을 모색하였다. 1922년 봄 훈하(琿河) 유역에 땅을 빌려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4월 17일부터 5월 3일까지 베이징에서 안창호, 이동휘, 유동열, 노백린 등과 함께 임시정부 변혁과 관련된 국민대회 개최에 대해 협의하였다. 4월에는 베이징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군벌 우페이푸(吳佩孚)를 만나 무기와 군자금을 후원받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둔전병제에 입각한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군자금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김규흥과 함께 11월 4일 한중 합작으로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창립하였다. 또한 베이징 인근 석경산(石景山)에 농장을 마련하여 자금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극심한 자금난에 빠지고 말았다. 1923년 초 북만주와 서북간도 동지들과 연락하여 농장 개설에 노력하였다. 5월에는 군자금 마련 차 황학수(黃學秀)를 만주로 파견하였고, 익세보(益世報) 사장 두죽헌(杜竹軒)의 소개로 지난(濟南)으로 가 산둥성장(山東省長) 웅병기(雄炳璣)와 바오딩(保定)의 차오쿤(曹錕)에게 병기와 군자금 제공을 요청하였으나 모금액은 미미하였다. 이에 그는 하와이에 도움을 요청하여 대조선독립단원들로부터 송금을 받았으나 이 역시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그해 말 창조파 국민위원회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는 국민위원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1924년 1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비서장에 임명되었으나 이견 끝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6월 국민위원회는 그를 위원회에서 축출하였다. 8월에는 권상수(權相洙), 권성근(權性根), 박학래(朴學來) 등과 함께 석경산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베이징의 족숙 박건병과 김복, 김강(金岡),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 출신의 박영선(朴永善) 등과 교류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함께 독립군기지 건설에 대한 출구를 모색하였다. 김현구의 우성유전에 의하면, 박용만은 1924년 말경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사절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였다 한다. 펑위샹이 득세하자, 그는 펑위샹의 세력기반이자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내몽고에서 한인에 의한 둔전병 양성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매료된 펑위샹은 3인의 밀사를 일본관동군과 조선총독부에 파견하였다. 파견 목적은 내몽고에 둔전 개척이 러시아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밀사 3인 중 한 사람으로 조선에 밀입국하였다고 한다. 1925년 봄, 장자커우(張家口) 부근에서 안창호, 문창범과 만나 저축회사 설립을 협의하였다. 필요 자금은 자신은 20만엔, 문창범은 30만엔, 안창호는 10만엔으로 분담하였다. 1925년 7월 독립군기지 개척자금을 모집 차 6년 만에 하와이를 방문하였다. 1년간 하와이에 머물며 군자금 모집과 대조선독립단 조직 강화에 주력하였고, 12월 초순에는 하와이지구 주둔군사령부에 리레포트를 제출하였다. 레포트에 실린 내용은 미국을 설득하여 중국 군벌 우페이푸를 원조하게 하고 우페이푸가 세력을 얻으면 장쭤린(張作霖)을 협공하여 궁극적으로는 만주지방에 또 하나의 조선국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거절로 이 계획 또한 실현되지 못하였다. 1926년 6월 베이징으로 돌아와 하와이에서 모금한 돈으로 땅을 구매하여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를 설립하고 융딩허(永定河) 부근에서 수전(水田)을 경영하였다. 또한 베이징 숭무문(崇武門) 밖에 소규모 정미소를 세워 수만 석의 정미(精米)를 만들기도 하였으나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8년 중국 국민군의 옌시산(閻錫山) 장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옌시산 장군에게 청원서를 작성해 놓았다. 그러던 중 10월 17일 대륙농간공사로 이해명(李海鳴)과 이지견(李志堅, 이명 李海雲) 등 2명의 청년이 찾아와 1천원의 자금을 요구하였다. 이때 농장의 형편을 설명하며 거절하였으나 이해명이 쏜 총에 맞아 절명하였다. 박용만의 죽음은 1924~5년경 국내 밀입국설과 조선총독 밀회설이 원인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의혹에 싸여 있다. 저서로는 1911년 4월과 7월 간행된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과 『군인수지(軍人須知)』가 있고, 1927년에는 한글교과서 2권을 출간하였고, 6월에는 만주가 조선의 옛 강토였음을 주장하는 3편의 논문이 실린 책을 석판인쇄로 출판하였다.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재미한인사회를 이끌던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미주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였으며, 1911년 『무형국가론(無形國家論)』을 주창하여 한인 최초로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공소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4-03-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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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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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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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상동교회 서울특별시 중구
2 사적지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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