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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7578
성명
한자 朴健秉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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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1993 훈격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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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 8. 11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김상덕(金相德) 등과 함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을 조직하고 활동, 같은 해 10월 10일 철원 사요리(四要里) 우시장(牛市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그후 중국에 건너가 1920. 1. 20 상해임시정부 의정원(上海臨時政府議政院) 의원(議員)(강원도(江原道) 대표)에 선출되고, 1921. 4. 20 북경(北京)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國民代表會籌備委員)에 선임되어, 같은 해 9월 상해(上海)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참석하였으며, 1926. 10. 16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의 집행위원에 선출, 1928. 5. 12 만주(滿洲) 화전(樺甸)반석(盤石)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에 참석하여 중국관내 및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는 등 1919년에서 1928년까지 약 9년간에 걸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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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1919년 8월 11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東松面)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김상덕(金相德)과 회합하여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군단(郡團:일명 철원애국단)을 설치하기로 하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여 지방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의 정세 및 민심의 동태 등을 애국단 본부에 보고하면서, 임시정부로부터 오는 각종 명령을 실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학무과장에 당선되었다.

동년 10월 10일 전단을 만들어 철원면 내의 민가에 배포하는 한편 이날 오후 8시 철원면 사요리(四要里) 우시장에서 미국기, 만국기,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군중들에게 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고무하며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20년 1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20일 북경(北京) 교외 삼패자(三牌子) 화원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였다.

1925년 6월 2일 북경에서 선두자사(先頭者社)의 명의로 조남승(趙南升) 등과 함께 「중국국민의 구국구족운동에 당하여 우리 2천만 형제자매에게 고함」이라는 항일선전문을 반포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중한(中韓)이 연합하여 일본을 총공격하여야 한다. 국내외의 각종 사회 단체와 한국 민족운동 단체와 연합합작의 의지를 표시하며 중국 국민운동에 대하여 정신 및 물질의 응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1926년 10월 16일에는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유일당(韓國獨立唯一黨) 북경촉성회(北京促成會)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동삼성 화전(華甸)과 반석(磐石)으로 세 번이나 옮기면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에 참석하여 중국 관내 및 동삼성 지역에서의 항일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연감 200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110면
  •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246·247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68·76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4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5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189·993·994·99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6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62·299·5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456·515면
  • 독립신문(상해판, 1920. 3. 6)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건병 호 : 맹천(孟泉) 강원 철원(鐵原) 국민대표회의, 관내민족유일당운동
본문
1892년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태어났고, 본적은 철원군(鐵原郡) 김화면(金化面) 읍내리(邑內里)이다. 아호는 맹천(孟泉)이며, 박용만(朴容萬)의 5촌 조카다. 1919년 철원에서 비밀결사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은 그해 7월 연통제 실시를 위해 상하이에서 국내로 파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과 연결되면서 임시정부 지원단체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단을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 1919년 8월 11일 본부에서 파견한 김상덕(金相德)이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東松面)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철원의 기독교 및 교육계 인사들과 회합하여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 철원군단(鐵源郡團, 일명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곧 강원도의 조직을 관리하는 강원도단(江原道團)으로 승격하였고 이때 학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강원도단은 각 지단과 연락을 통하며 임시정부의 선전과 독립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는 한편, 철원의 도단에서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신상완(申尙玩)과 함께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출범한 통합정부를 축하하는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다만 만세시위 뒤 조직의 발각을 우려하여 단원 가운데 오세덕(吳世德)과 함께 두 사람만 표면에 내세우고 거사 뒤에 곧바로 상하이로 망명시키기로 하였다. 1919년 10월 10일 두 사람은 철원면 사요리(四要里) 우시장에서 임시정부 축하연설회를 열고 이어 만세시위를 주도한 뒤 곧바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상하이로 망명한 후 1920년 1월 20일에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5회 회의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약 2개월 동안 활동하였지만 곧 의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이후 주로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는데, 1920년 8월 베이징에서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반발하여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신채호(申采浩)·신숙(申肅) 등이 중심이 되어 베이징군사통일촉성회(北京軍事統一促成會)를 발족하여 남·북만주와 각지의 군사단체의 통일을 모색하였다.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열린 군사통일회의에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 등 각지의 10개 독립군 단체 대표 18명이 참가하였다. 권승근(權承根)·김현구(金鉉九) 등과 함께 하와이독립단 대표로 참가하였는데, 이 단체는 1919년 3월 박용만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반포한 대한독립의군부의 하와이지부로서 설립한 대조선독립단이었다.4월 20일 회의에서 서기로, 그리고 홍남표(洪南杓)·이광동(李光東)과 함께 의안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4월 24일 회의에서는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불승인안’을 통과시켰다. 4월 25일에는 이 결의안을 상하이에 직접 전달하기 위해 신달모(申達模)를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때 남공선(南公善)과 함께 임시정부에 발송할 통첩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통첩(通牒)에는 “베이징군사통일회는 일반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일체 불승인하고 또 그 과정과 장래의 제반 시설을 무효로 인정한다”는 결의안을 적었다. 4월 27일 회의에서는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을 결정하였다. 5월 16일 국민대표회 소집안을 통과시키고 다음날 선언문을 가결한데 이어, 5월 20일에는 위임통치청원자 성토문을 통과시켰다. 6월 2일 회의에서는 신숙·김갑(金甲)·박용만·남공선과 함께 국민대표회주비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2일까지 계속된 베이징군사통일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위원제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 국민대표회를 소집하기로 했던 것이다.상하이의 국민대표회 기성회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협의를 요구해 오면서 상하이와 베이징 사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크게 진전되어, 양측이 국민대표회를 1921년 9월 15일 열기로 합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9월 15일 국민대표회 개최를 목표로 양측의 대표 모임이 열렸고, 여기에 최목(崔穆)과 함께 베이징 측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때 상하이 측에서는 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여운형呂(運亨)·이탁(李鐸) 등 5명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부옹호파가 국민대표회의를 정부파괴운동이라고 규정하고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국민대표회 개최에 필요한 경비조달의 어려움과 함께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회의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9월 15일 국민대표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1922년 2월 태평양회의가 기대와 달리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면서 다시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제기되어, 1922년 8월 상하이·베이징·톈진(天津) 등 각지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모여 9월 1일 국민대표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2월 21일 준비위원 간담회를 가진 뒤 12월 27일 예비회의를 열어 1923년 1월 3일부터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였다.1923년 1월 3일 마침내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고 김갑과 함께 베이징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회규(會規)기초위원으로 선출되어 국민대표회의 일정을 보고하였다. 1월 30일까지 이어진 임시회의에서는 각지에서 온 단체와 지역 대표의 자격 심사가 진행되었다. 이어 2월 3일 회의에서는 국민대표회에서 공포할 선서와 선언서를 작성할 기초위원 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3월 5일 회의부터 최대 쟁점이 된 시국문제가 토론되면서,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파와 임시정부의 해체와 새로운 정부 건설을 주장하는 창조파의 격론이 이어졌다. 3월 8일 창조파를 대표하여 임시정부 문제해결이 통일책은 아니며, ‘정자부자(政字府字)’만이 정부가 아니므로 과거 내외 각지의 대소 단체기관은 다 무효로 돌리고 새로운 기관을 조직하자고 주장한 후, 혈전주의 하에 폭력 수단과 급진 보조를 취할 기본 방침을 세우자라고 연설하면서 임시정부 해체와 새 기관 건설 및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국시확립안(國是確立案)을 제의하였다.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 해체를 반대하던 개조파가 5월 15일·16일 양일간 국민대표회를 집단 탈퇴함으로써 결렬되고 말았다. 창조파는 1923년 6월 7일 국민대표회의를 열고 자파만으로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제의 헌법’을 통과시키고 국민대표회의의 폐회를 선언한 뒤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1924년 2월 19일부터 창조파가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신한촌에서 국민위원회를 열자, 베이징 대표로 참가하여 국민위원회 집행위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군이 시베리아철병을 단행하여 소련과 일본 사이에 협상 국면이 전개되면서 한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곤란해지는 등 정세가 크게 바뀌었다. 결국 코민테른은 약속했던 재정 지원을 보류하였고 신정부 설치를 허가하지 않아 사실상 국민위원회는 와해되었다. 국민위원회는 신정부 건설 대신에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에서 추방되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1924년 3월 16일 베이징 동안시장 동안다루(東安茶樓)에서 장건상(張健相)이 발기하여 열린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기독교 북감리교 동양감독 미국인 하버드 웰슈가 홍콩(香港)에서 1923년 9월 일본의 간토(關東)대지진 때 조난당한 조선인과 우리 민족에 대해서, 조선은 안정되고 이전의 평화 상태를 회복하고 있으며 불평하는 무리는 한국독립의 계획을 포기하고 안온한 상태에서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 내용은 우리 민족을 모욕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그 대책으로 한국인의 참상을 영문·한문 등으로 번역하여 외국 각지에 발송하기로 하였다. 그해 8월 베이징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가 조직되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1925년 3월 1일에는 비밀결사인 도보사(導報社)의 기관지인 『도보(導報, 앞잡이)』 창간호에 보도사원으로서 「혁명운동 상 조직의 여하」라는 글을 실었다. 『도보』는 무장투쟁을 수단으로 절대 독립을 쟁취하고 파벌을 극복하여 대동단결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며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운동을 반대하였다. 그해 5월 14일 상하이의 면방적 공장 노동자들이 이유 없이 해고되자 이에 항의하여 5월 30일 총파업과 함께 반제 시위를 벌이자 일본과 영국의 자본가가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6월 2일 베이징에서 선두자사(先頭者社)의 명의로 조남승(趙南升) 등과 함께 「중국국민의 구국구족운동에 당하여 우리 2천만 형제자매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반포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중한(中韓)이 연합하여 일본을 총공격할 것, 국내외의 각종 사회 및 단체와 한국 민족운동 단체와 연합 합작하여 투쟁의 의지를 표시할 것과 동시에 중국 국민운동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적인 원조를 아까지 말아야 할 것 등이었다.이 무렵 중국 관내에서는 분열된 독립운동계를 새롭게 통일하는 방안으로 민족혁명론을 매개로 한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26년 10월 10일 베이징의 고려기독교회 예배당에서 독립을 위한 대동단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1차 모임이 열렸고 이어 12일에 대독립당조직베이징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를 결성하고 16일 3차 회의에서 장건상·원세훈·조남승·조성환·배천택·김광천과 함께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베이징·텐진·난징(南京) 등 각지에서 선출된 촉성회 대표가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결성하고 15인의 집행위원을 뽑을 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관내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진행되던 무렵 만주에서도 정의·참의·신민 3부가 중심이 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동삼성 화디엔(華甸)과 판스(磐石)로 세 번이나 옮기면서 전민족유일당조직회가 열리자, 상하이의 홍면희(洪冕憙, 홍진 (洪震))와 함께 베이징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민족유일당운동은 유일당의 조직 방법을 둘러싼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그 후 정의부의 근거지인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동향수하자(東珦水河子)에 있는 계림(鷄林)학교에서 교사가 되어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1932년 1월 10일 불행히도 동네 이규삼(李圭三)의 집에 든 강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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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애국선열 추모비(철원) 강원도 철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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