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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286
성명
한자 盧秉漢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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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인도네시아방면 포상년도 2008 훈격 애국장
1944년 12월 일본군(日本軍) 군속(軍屬)으로 인도네시아 쟈바섬에서 연합군 포로감시요원으로 있던 중 같은 군속이었던 손양섭(孫亮燮)의 권유로 이활(李活) 등이 조직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에 가입하였으며 1945년 1월 4일 싱가포르로 전속명령을 받고 이동 중 손양섭(孫亮燮), 민영학(閔泳學)과 함께 탈출하여 형무소장과 군납업자 등 일본인을 사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총상을 입고 동월(同月) 5일 자결(自決)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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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노병한은 일제 말기 연합군 포로 감시요원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일제는 1942년 5월 조선군(朝鮮軍)에 한국인 포로감시원 모집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3천여 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실제로는 관할 경찰서에서 학력·직업·연령·가족사항 등을 조사하여 출두명령서가 전달되었다. 당시 포로감시원 지원자는 극히 적었기 때문에 각도에 할당되어 실시되었으며, 각 부, 읍면장과 아울러 경찰서·주재소에서 모집을 강권하였다. 노병한도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응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병한을 비롯한 3천 여명의 한국인 청년들은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 통칭 野口부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은 1942년 8월 동남아시아로 출발하였고, 노병한은 9월 14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구에 도착하였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도착한 그는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자바섬에 군속으로 온 1,400명의 한인 포로감시원들은 1944년 6월 2년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한인들을 조국에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이에 한인 군속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李活, 본명 李億觀)을 중심으로 중부자바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라는 고원지대에서 1944년 12월 29일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당시 암바라와(ambarawa)지구에서는 손양섭(孫亮燮)·조규홍(曺奎洪)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노병한·민영학(閔泳學)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945년 1월 3일 중부 자바의 암바라와에서 고려독립청년당원으로 지하공작을 하던 노병한 등 군속 6명이 갑자기 말레이 포로수용소로 전속명령을 받게 되었다. 암바라와지구의 책임자인 손양섭은 갑작스런 전출 명령에 고려독립청년당 조직의 정보가 일본군들에게 누설된 것으로 판단하고, 노병한·민영학과 사후책을 강구하였으나 별다른 방안이 있을 수 없었다. 1월 4일 일본군 명령에 따라 전출 명령을 받은 노병한 등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노병한과 손양섭·민영학 3인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에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노병한과 민영학은 탄환 3천발을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하고 잠복하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암바라와 억류소장은 긴급히 세마랑분소에 연락하여 병력을 요청하여 그날 밤 수십 명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대 내에서 의거를 감행한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자, 수수밭으로 들어가 자기 소총의 방아쇠를 구두끈에 매어 가슴에 대고 자결하였다. 일본군에 쫓기다가 위생재료창고 안으로 들어온 노병한과 손양섭은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였다. 암바라와의거 이후 고려독립청년당에서는 제2차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중간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관련자 10명이 일본군사령부에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았아야만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日報(1947. 1. 14)
  • 在자바 高麗獨立靑年黨과 세 義士(安承甲, 1957년) 40~42, 49~56쪽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ⅳ(독립기념관, 2006) 동남아지역 155~156면
  • 赤道下의 朝鮮人叛亂(內海愛子·村井吉敬 共著, 1980) 148~15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노병한 - 강원 김화(金化) 고려독립청년당 사건, 암바라와 의거
본문
1920년 4월 4일 강원도 김화군(金化郡) 원남면(遠南面) 구룡리(九龍里, 현 북한 강원도 김화군 구봉리)에서 태어났다. 1942년 5월 3,00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군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되었다가, 인도네시아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하고 암바라와 의거를 일으켰다.태평양전쟁기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전쟁의 최전선에 배치할 한국인 포로감시원 지원자를 지역별로 할당한 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되어 부산에 있는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에서 2개월간 기본 훈련을 받았다. 당시 임시군속교육대는 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노구치(野口)부대라고 불리었다. 이곳에서 포로 감시 교육을 받고 1942년 8월 국내를 떠나, 9월 14일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위치한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구에 도착하였다.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일본군 지시를 받으며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게 되었다. 군속계약 2년은 1944년 6월부로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한국인 포로감시원 모두 계약 만료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으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이 결성되자 이에 가담하였다. 고려독립청년당에는 자카르타· 세마랑(Semarang·스모워노Sumowono)·암바라와(Ambarawa) 각지에 있는 한국인들이 연락을 취하며 참여하고 있었다.1945년 1월 3일 중부 자바의 암바라와에서 말레이반도 포로수용소로 전출 명령을 받게 되었다. 갑작스런 전출 명령에 고려독립청년당 조직의 정보가 누설된 것으로 판단하고, 암바라와에 함께 있던 손양섭(孫亮燮)·민영학(閔泳學)과 함께 일본군에 대한 항쟁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1월 4일 전출 명령에 따라 세마랑 지역으로 이동하는 도중, 일본군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에 주둔한 일본군 분견소에 잠입하고, 무기고에서 기관총과 탄환 등을 확보한 후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일본군에 대한 항쟁은 분견소와 일본군 형무소 등에 대해 이뤄졌다. 먼저 분견소를 공격한 일행은 일본군의 억류소와 어용 상인 등을 공격하고, 형무소장을 사살하였다. 일시적으로 잠복해 있는 사이 암바라와 일본군 병력은 타 지역에서 추가 병력 증파를 요청하였다. 수십 명의 일본군에 의해 포위된 이들은 격렬하게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치명적 부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민영학이 먼저 인근 수수밭에서 자결하고, 손양섭과 함께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였다.암바라와 의거는 고려독립청년당 일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제2차 의거를 계획하였다.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은 대대적인 한국인 저항 세력 색출에 나섰고, 결국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은 일본군에 의해 발각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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