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1년 2월
3. 1915년
4. 1919년 3월 만세사건에 관련
5. 1919년 8월 7일
6. 1920년 3월 9일
(이상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호는 경암(景岩)이고, 초명은 상덕(相德)이다.
1908년 김화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설립하여 2세 교육에 진력하여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항일사상을 고취하다가 1911년 2월 김화경찰서로부터 폐교 명령이 내려 부득이 폐교한 뒤 춘천농업학교(春川農業學校)를 졸업. 1913년 4월 수원농림학교(水原農林學校)에 입학하여 3학년에 재학 중 은밀히 동지를 규합하고 항일투쟁을 꾀하다가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1915년 홍천(洪川)의 포인의숙(布仁義塾)에서 교편을 잡고 2세 교육에 진력하였으며, 1918년 4월 연희전문학교(延嬉專門學校)에 입학하여 2학년 재학 중 1919년 3.1운동 당시 김원벽(金元壁), 강기덕(姜基德), 한위건(韓偉健)등과 활약하였다. 3월 5일 제2차 학생시위운동을 주도하여 서울시내에서 전개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8월 6일 출감하였다.
출감 후 1919년 8월 7일 남대문 밖 노상에서 권인채(權仁菜)를 만나 도산 안창호 선생과 연계되어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이 되었고, 상해임시정부의 지원단체로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에 참여하고 강원도에 애국단지단을 조직하라」는 권유를 받고 이에 찬동하였다. 그 후 바로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하여 단장인 신현구와 함께 조직을 확대하는 등 주요역할을 하였다.
1919년 8월 11일 고향인 철원으로 내려가서 박연서(朴淵瑞) 등을 만나 상의하고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을 조직· 창단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철원군단이 강원도단(江原道團)을 겸무하여 활약하던 중 일경에게 발각되어 여러 간부들과 함께 주모자로 체포되어 1920년 3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西大門)·원산(元山)·강릉(江陵) 등의 여러 감옥을 전전하며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6․16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5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27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82․1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59․73․89․93․9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90, 993, 1001, 1003~1005, 1011, 101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