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703
성명
한자 金順福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2 훈격 대통령표창
1919년 3월 강원도(江原道) 철원군(鐵原郡) 갈말면(葛末面) 문혜리(文惠里)에서 만세세위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다가 체포되어 (笞) 90(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김순복은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갈말면(葛末面) 문혜리(文惠里)에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갈말면의 독립만세운동은 문혜리의 서당 훈도 신성규(申聖奎)와 당시 보성전

문학교 학생이던 김칠룡(金七龍)이 협의하여 추진하였다. 각 마을에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연락하여 통성리·동막리·내대리·도창리(道昌里) 주민

은 청양리주재소가 있는 지경터로 모이게 하고, 문혜리·군탄리(軍炭里) 등 남부의 주민은 문혜리 면사무소가 있는 어음째로 집결시켰다. 3월 11일 청양리 주

재소 앞, 즉 지경터에서 토성리로 뻗쳐 있는 벌판에 모인 군중은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지경터에서 오후 1시경부터 시위를 벌이던 군중은 방향

을 바꾸어 문혜리로 갔다. 문혜리는 북으로 지경터를 거쳐 김화로 가고 남쪽으

로는 지포리(芝浦里)를 거쳐 서울로 통하는 조그마한 주막거리다. 문혜리에는

당시 갈말 면사무소가 있었는데 군중은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 후 체포된 김순복은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태

90도를 받고 5월 12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914~915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537~53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순복 - 강원도 철원(鐵原) 3.1운동
본문
1897년 2월 26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갈말면(葛末面) 문혜리(文惠里)에서 태어났다. 강원도 철원은 서울과 가깝고 이동이 편리하여 3·1운동 소식이 신속하게 전해졌다. 3월 1일 철원군 천도교 교훈(敎訓)이었던 최병훈(崔炳勳)은 평강군(平康郡) 평강면(平康面) 동변리(東邊里) 천도교 교구실에서 이태윤(李泰潤)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매를 전달받아, 3월 2일 군내에 배포하였다. 또한 3월 3일 고종 장례식에 참가하려고 상경한 지역민의 상당수가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여, 독립 만세 운동의 분위기도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3월 11일 철원 읍내에서 한 사람이 보성전문학교 학생인 김칠룡(金七龍)의 집에 방문하여 ‘철원 읍내는 만세를 불렀으니 이 마을에서도 만세를 불러야 하지 않느냐’라며 권유하였다. 이어 문혜리(文惠里) 서당 훈장인 신성규(申聖奎)가 김칠룡에게 만세 시위를 제안하자, 함께 갈말면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 마을의 가정에서 각각 1사람씩 나오도록 권유하였다. 이때 문혜리에 사는 김학길(金學吉)·전사진(全士進)·김경삼(金敬三)·김상보(金相保) 등이 시위 준비에 참여하였다. 또한 내대리(內垈里)의 임낙호(任洛鎬), 동막리(東幕里)의 윤호병(尹浩炳), 토성리의 황철성(黃徹性)도 잇달아 가담하였다. 이들은 8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11일 오후 11시경 갈말면 지포리(芝浦里)에 위치한 갈말면사무소와 지포헌병주재소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임낙호 등 4명이 체포되었다. 3월 12일 오후 1시경 토성리·동막리·내대리·도창리(道昌里) 등에서 다시 모여든 약 800명의 시위대는 김화군(金化郡) 서면(西面) 청양리(淸陽里)에 위치한 청양리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약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갈말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약 1,000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지포리에 도착해 면사무소 부근에서 독립 만세를 반복하여 외쳤다. 이때 면사무소 직원은 물론 면장까지 모두 도망간 상태였다. 전사진·김경삼·김학길 등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한편 시간이 지나 어두워지자 숨어있던 면장 황희수(黃熙秀)가 나타나 시위대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던 시위대는 면장의 권유와 헌병들의 저지로 오후 9시경 해산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度)를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위패)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순복(관리번호:30703)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