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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955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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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世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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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6 훈격 대통령표창
1928년 미국 뉴욕에서 『3.1신보(三一申報)(社) 발기인, 시카고 동지회 지회 총무, 1929년 북미유학생총회 재무부장, 1930년 시카고 공동회 서기, 1932년 뉴욕학생회 회장, 1933년 북미유학생총회 부회장, 1935년 북미유학생총회 총회장, 1941년 뉴욕 동지회 서기, 1944년 주미외교위원부 경제위원회 위원 등의 직책으로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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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28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발기인, 동지회(同志會) 시카고지회 총무,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재무부장, 시카고 공동회 서기, 북미유학생총회 부회장, 뉴욕 동지회 서기,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경제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뉴욕에서 삼일신보사 발기인, 동지회 시카고지회 총무, 1929년 고려학우회 사교부원,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위스콘신주 레이진에서 개최된 동양학생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의 만행 등을 폭로하였다.

1930년 2월 시카고에서 해외 한인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대한인공동회(大韓人共同會)를 창립하고 서기로 당선되었다. 1932년 2~3월경 뉴욕에 본부를 둔 산업협회 서기, 뉴욕학생회 회장, 1933ㆍ1935년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1935년 4월 뉴욕에서 개최된 성재 이동휘(李東輝) 선생 추도회에 참여하여 추도사를 하였다. 같은 해 6월 북미유학생총회 동부연회 총회장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1936년과 1941년 뉴욕에서 열린 3ㆍ1절 기념식에서 「독립 진상」과 「독립운동 약사」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41년 뉴욕 동지회 통상회 서기로 활동하였고, 1943년 12월 뉴욕 한인교회에서 한국의 절대 독립과 독립 후 경제문제 연구를 위한 조선경제문제연구회 조직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5월 유일한(柳一韓)ㆍ남궁염(南宮炎) 등과 함께 주미외교위원부 경제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협찬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45년 7월 뉴욕한인학생회 신임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 국무부 검열국에서 일본 문서를 분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28. 2. 16, 10. 4, 11. 8, 1929. 4. 11, 5. 16, 9. 26, 10. 24, 1930. 2. 13, 1932. 2. 18, 3. 3, 3. 31, 5. 12, 1933. 6. 22, 7. 20, 1935. 4. 18, 7. 4, 1936. 3. 5, 1941. 3. 20)
  • 東亞日報(1933. 10. 22)
  • 每日申報(1933. 10. 23)
  • 태평양주보(1941. 월일 미상)
  • 독립(1944. 3. 15, 1945. 8. 1)
  • 국민보(1944. 8. 2)
  • 북미시보(1944. 10. 1)
  • 『三一申報』創刊 趣旨書(1928. 3. 22) 移入輸入 不穩刊行物 槪況
  • 在米朝鮮人學生總會의 經過狀況에 關한 건(1932. 7. 27) 日本外務省特殊調査文書(高麗書林, 1989) 제59卷
  • 이승만이 연합회에 주미위원부 및 여타 위원회의 조직 계획 요강을 통고(1944. 5. 2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11) 제43권
  • 주미위원부의 특별회담(1944. 6. 5), 주미외교위원부 통신 제89호(1944. 9. 2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7) 제19권
  • 현엘리스와 그의 시대(정병준, 2015) 13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세선 - 강원도 철원(鐵原) -
본문
1902년 7월 5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철원면(鐵原面) 중리(中里)에서 태어났다. 1925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활동 중인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 관계자들이 3·1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도보(導報)』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행하자, 일본 지역 배포인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와세대학교(早稲田大學校)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6년 4월 하와이에 도착하여 이승만(李承晩)의 환영을 받았으며, 유학을 목적으로 시카고(Chicago, 지성(芝城))로 건너갔다. 루이스 인스티튜트(Lewis Institute, 현 일리노이공과대학 IIT)를 1930년 졸업하였다. 1928년 2월 시카고 한인공동회에서 활동하였다.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중국 관헌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공동회 관계자들은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재만동포문제 대책강구회」를 조직하였는데, 여기서 강영소(姜永韶)·정래은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6월 뉴욕 한인교민단(韓人僑民團)이 이승만과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후원할 목적으로 창간한 『삼일신보(三一申報)』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9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한인들과 함께 한인예배당에서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시카고지회를 조직하고, 회장 김일선·부회장 황휴와 함께 총무로 선정되었다. 1929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위스콘신주에서 개최된 동양학생대회에 이훈구(李勳求)·최마르다와 함께 참여하였다. 여기서 이훈구와 함께 서구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본제국 침략의 상징인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횡포와 기만에 대해 폭로하였다. 10월에는 북미대한인유학생회(北美大韓人留學生會) 재무부장으로서 영문 잡지 발간 후원금을 모집하였다. 1930년 2월 시카고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후원하고 국외 한인 사회를 통일시켜 독립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에서 대한인공동회를 조직하였으며, 회장 김경과 함께 서기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로 진학하였고, 1932년 뉴욕학생회장을 맡았다. 1932년 2월 일본이 중국에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미주 한인 사회에 전해지자 뉴욕 한인들은 세계가 주목한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시킬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뉴욕 한인공동회가 공동대회를 개최하자 여기에 뉴욕학생회 회장의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공동회를 항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만들고자 규칙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6월에는 북미대한인유학생회 임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회장 갈홍기와 함께 부회장으로 선정되었다. 9월에는 뉴욕 한인들과 함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후원하려고 기념사업회 뉴욕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5년 4월 뉴욕 한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이동휘(李東輝) 서거 추도식을 개최하였으며, 여기서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1936년 3월에는 뉴욕 한인공동회 명의로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여기서 「독립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41년 3·1운동 기념식에서는 「독립운동약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35년 당시 뉴욕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하고 있었으며,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하였다. 1943년 12월 뉴욕 한인 청년들과 함께 카이로회담(Cairo Conference, 1943.11.5~11.6)에서 미국·영국·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광복 이후 한국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조선경제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정할 임원선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미국 국무성 검열국에서 일본 문서 분석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8년 10월 25일과 11월 18일에 한국에서 발생한 수재 및 한재 등의 구제금으로 10원, 1929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금으로 5원, 1930년 2월 13일에 독립의연금으로 2원, 1930년 2월 27일과 1930년 3월 6일에 일본의 만행과 독립을 영미권 국가에 호소하려는 목적에서 영문 잡지 발행 기금으로 20원 등을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그리고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재정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주미대사관 참사관에 임명되어, 대사 장면을 보좌한 바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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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천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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