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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1일 출생하였으나, 부친이 늦게 출생신고를 한 탓에 호적에는 1927년 3월 1일생으로 되어 있다. 본적은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서변면(西邊面) 관전리(官田里)이고,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월산면(月山面) 황암리(廣岩里)이다. 「신분장지문원지」에는 본적이 경기도 용인으로 되어 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기쿠타 시게요시(菊田重吉)이다.
빈농(貧農)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가 되던 봄, 부친과 조모를 따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보산면(寶山面) 신남천리(新南川里) 93번지로 이사하였다. 당시 부친은 잡화상을 경영하였다. 7세 여름 무렵 신남천리의 한문 서당에 입소하고, 10세 때인 1933년 퇴소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황해 평산군 소재 남천공립보통학교(南川公立普通學校) 1학년에 입학하였다. 1939년 3월 26일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관립사범학교(平壤官立師範學校) 보통과 1학년에 지원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이 시기 부친의 잡화상이 어려움에 처하자, 부친을 따라 다시 강원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로 이사하였다. 이사 후 철원남공립고등심상소학교(鐵原南公立高等尋常小學校) 1학년에 입학하여 1941년 3월 25일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23일 조선총독부 철도종사원양성소(鐵道從事員養成所) 전기과에 입소하였다.
같은 해 5월 상순경, 철도종사원양성소 사감(舍監) 후쿠다(福田)에게 머리를 맞고 질책을 당하였다. 또한, 교련 시간에는 학생들이 그를 분대장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이라고 경멸하면서 일본인 학생을 분대장으로 선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겪으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인을 타도하고 영원히 융성할 조선의 나라를 건설하고 싶다’라는 뜻을 품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부터 다시 태어나 지금까지 학교 선생에게서 배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입장을 벗어나 조선 독립을 행할 민족주의자가 되고, 반드시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을 뒤집어 되돌릴 혁명가가 되겠다”라고 쓴 1941년 6월 4일 자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위해 소학교 동창생이자 철도종사원양성소에 같이 다니던 이희남(李熙南, 창씨명 竹原熙)과 경성유학오인조(京城留學五人組)를 조직하였다. 재경유학생동맹(在京留學生同盟)인 경성유학오인조는 철원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 일본인의 차별 대우를 받으며 민족의식에 눈뜨고 광복을 달성하고자 위해 결성한 조직이다. 나머지 조직원은 임정호(任程鎬, 창씨명 豊川淸)·이상운(李相運, 창씨명 岩本正)·이상배(李相培, 창씨명 義田幸弘) 등이었다. 이들은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 내선일체(內鮮一體) 반대, 징병 반대 등을 내세웠다. 경성유학오인조는 주로 일요일에 아현동(阿峴洞) 등지에 있는 조직원의 하숙집이나 북악산(北岳山) 등에서 모였다. 모임은 국중일이 이희남에게 엽서를 보내면 이희남이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연락하여 만나는 방식을 취하였다. 경성유학오인조는 주로 조선 역사를 연구하거나 민족의식을 높이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예비 지식을 획득하려고 여러 서적을 구입·탐독하였다. 이때 그 자신도 『조선명인전(朝鮮名人典)』(제1·2·3권), 『조선민요선(朝鮮民謠選)』, 『조선최근세사(朝鮮最近世史)』, 『삼국사기(三國史記)』, 『이왕가비사(李王室秘史)』 등의 서적을 읽었다.
또한, 오인조 외에도 다른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감상문’이나 ‘서(序)’ 등의 글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마쓰모토 미쓰히로(松本光弘)나 토오루(東徹)에게 수차례 규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이들은 오히려 국중일이 체포당하여 신문을 받을 때 증인으로 나서기까지 하였다.
경성유학오인조 조직원들은 불온한 언동을 한다는 것을 빌미로 차례로 용산경찰서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1942년 3월 8일 체포당한 뒤 1943년 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또한, 이른바 육해군형법(陸海軍刑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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