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그는 천도교도로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다음날인 1919년 3월 2일에 천도교 익산교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각처에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송일성은 천도교 전주교구를 통하여 선언서와 함께 만세운동의 방법도 연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익산교구장 박영진(朴永鎭)을 비롯하여 이중열(李仲悅)·이유상(李有祥)·정대원(丁大元)·이형우(李亨雨)·유봉유(劉奉裕)·김병호(金秉鎬) 등 익산교구의 인사들과 함께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웠는데, 이 때 송일성은 함열면(咸悅面)과 논산(論山) 지방에 대한 연락 및 동원 책임을 맡았다.
또한 이들은 기독교도와 연대를 모색하는 한편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가 순도(殉道)한 3월 10일 9시에 각처에서 일제히 거사하기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여 거사 당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4. 15 대구지방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