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9월 전북 (全北) 익산군 (益山郡) 금마면 (金馬面) 에 거주 (居住) 하다가 독립만세 시위 운동 (獨立萬歲示威運動) 이 일어난후 (後) 가재 (家財) 와 전답 (田畓) 을 매각 (賣却) 한 돈을 가지고 중국상해 (中國上海) 로 망명 (亡命) 하여 상해 (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요원 (要員) 으로 활동 (活動) 하다가 동년 (同年) 9.27 연통제 (聯通制) 전라남북도 (全羅南北道) 양도 (兩道) 의 특파원 (特派員) 으로 임명 (任命) 되어 국내정보 (國內情報) 의 통신 (通信) 과 군자금 모집 (軍資金募集) 등으로 활동 (活動) 하여 상해 임시정부 (上海臨時政府) 를 지원 (支援)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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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산(群山)에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해 9월 가재(家財)를 팔아 자금을 마련한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군자금으로 제공하였으며 정부 요인으로 채용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7월 10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지방행정제도로서 연통제(聯通制)가 설치 공포됨에 따라 전라남북도 양도의 임시연통제 설치를 목적으로 국내 특파원에 임명되어 귀국하여 전라남북도 내에 비밀연락망을 두고 국내정보의 통신과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며 1921년까지 활동하였다.
1921년 연통제가 탄로되어 사실상 조직이 와해(瓦解)되었으나 초지일관하며 독립운동을 위해 암중모색(暗中摸索) 하다가 서울의 계림학원(鷄林學院)에서 강사로 재직하며 비밀리에 국내외의 독립운동과 연계 활동을 계속하던 중 신변이 불안하여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피신하여 10여년을 지냈다.
1931년 병을 얻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하에 자유를 구속받으며 살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년감 63·64면
- 부산군지(부산군, 1981. 4. 20) 1042면
- 미륵산의 정기(익산군, 1982. 9. 20) 13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305면
- 대한충의효열록(卷之下) 419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315·320∼3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