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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149
성명
한자 朴駬桓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 의병진(義兵陣)참진(參陣)하고 이규홍(李圭弘) 의병장(義兵將)부장(副長)이 되여 의병(義兵) 200여명(余名)총기(銃器) 300여점(余点), 탄약(彈藥)다량(多量)비축(備蓄)하여 고산(高山), 진안(鎭安), 장수(長水), 익산(益山) 등지에서 왜병(倭兵) 다수(多數)사살(射殺)하는 등 대 전과(大戰果)를 세웠으나 점차(漸次) 전력(戰力)쇠퇴(衰退)하여 1914년 4월 자진 해군(自進解軍)하고 재거의(再擧義)도모(圖謀)하다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조직(組織)됨에 익산(益山), 임피(臨陂) 대표(代表)활약(活躍)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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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박이환은 전북 익산(益山)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의진과 이규홍(李圭弘) 의진에서 의병활동한 후기 의병이었으며,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에 전념한 인물이다.

1906년 4월 25일 전북 정읍군 태인면 종성리(井邑郡 泰仁面 宗聖里)에서 면암이 거의하자, 박이환은 이규홍, 문형모(文亨謨)와 함께 참가하였다. 이때 박이환은 옥구(沃溝)·임피(臨陂)·함열(咸悅)·용안(龍安)·익산(益山) 등지를 다니면서 황제의 뜻을 전하여 의병운동에 참진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면암의 체포로 면암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 10월까지 의병을 모집하여 형 박영환(朴永桓)이 제공한 군자금으로 총기 3백여 점과 탄환 20여 두, 군도(軍刀) 50여 점, 그리고 화약 10여 두를 준비하여 의병운동에 대비하였다.

1907년 11월 6일 함께 거의한 이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副將)이 되어 250여 명의 의진을 구성하였다. 11월 25일 전북 고산면 가금리(高山面 柯琴里)에서 적과 교전하여 2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월 3일 진산(珍山)·금산(錦山)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2월 초순부터 전개된 일군의 의병 '대토벌작전'이 본격화됨에 따라 점차 의병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4월 21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1914년 3월 면암 의진의 정신적 지주였던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이 고종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를 창립하였음을 전해 듣고 그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때 박이환은 익산 임피(臨陂) 대표로 활약하였는데 적에게 행적이 드러나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자 지하로 들어가 은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돈헌유고 6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2면
  • 전북신문 1982. 9. 20∼9. 22 (이강오의 의병대장 오하 이규홍의 항일투쟁)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이환 호 : 야은(野隱) 전북 익산(益山) 최익현 의병부대, 이규홍 의병부대, 대한독립의군부
본문
1873년 3월 12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북일면(北一面) 금강리(金江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야은(野隱)이며, 본관은 밀양(密陽), 부친은 박윤서(朴潤瑞)이다.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이 전북 정읍군(井邑郡) 태인면(泰仁面) 종성리(宗聖里)의 임병찬(林炳瓚)의 집에 머물면서 의병 운동을 도모하자, 이규홍(李圭弘)·문형모(文亨謨)와 함께 임병찬을 찾아가 사제관계를 맺고 최익현 의병부대에 합류할 의사를 전달하였다.이후 이규홍을 중심으로 의병을 세우기로 하고 문형모와 함께 각 지방에서 산포수를 모집하는 한편, 뜻을 같이 하는 지사들을 규합하여 1906년 11월 21일에 출정하였다. 그러나 최익현 의병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임실(任實)에 도착하였을 때, 최익현 부대가 패주하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 11명이 관군에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부대를 이끌던 이규홍과 다음 기회에 재기할 것을 약속하며 부대를 해산하였다.1907년 임병찬이 대마도(對馬島)에서 귀국하자 이규홍·문형모와 함께 임병찬을 찾아가 최익현의 유지를 잇기 위해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엄중하여 함부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해 8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이후 군인들이 전국에 흩어져 의병에 참여하기 시작하자, 이규홍·문형모와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계획을 임병찬에게 전달하였다. 임병찬이 “신중을 기하여 병사를 일으키라.” 는 지시를 내리자 형 박영환(朴永桓)이 제공한 군자금으로 총기 300여 점과 탄환 20여 두, 군도(軍刀) 50여 점, 그리고 화약 10여 두를 준비하였다.1907년 11월 초에 의병을 일으켜 이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장(副將)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달 15일 고산군(高山郡, 현 완주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처음 조우해 여산(礪山, 현 익산)과 익산(益山)으로 옮겨가면서 10여 일 동안 교전하여 일본군 29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12월 5일 이후로는 진안(鎭安)·장수(長水)·용담(龍潭, 현 진안) 등 산악지방으로 부대를 옮기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였다.1908년 이후로는 전투가 길어져 의병들이 지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점점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결국 남은 의병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부대의 참모진이 박이환과 문형모만 남게 되자, 5월 20일 대전의 식장산에서 부대를 해산하였다.이후에도 계속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1912년 고종의 지시를 받은 임병찬이 호남 각지에서 의병과 유생들을 규합하여 재기하려고 하자 이규홍·문형모와 함께 동참하였다. 그 결과 1914년 3월에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가 창립되어 본격적인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익산·임피(臨陂, 현 군산) 지역 대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일제에 발각되어 이후 행동이 어려워지자 은신 생활을 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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