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유지명(柳志明) 의진에 가담하여 충남 여산(勵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4∼5년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박복순은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7년 12월 5일 유지명 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전북 고산(高山) 출신의 유지명 의병장은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9월 초순경부터 삼남의병대장 혹은 창의대장이라 칭하고 격문을 통한 의병모집에 주력하여 의진을 조직하였다. 그런 다음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박복순은 유지명 의병장의 지휘 아래 41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충남 여산군에 있는 일본군 순사분파소(巡査分派所)를 습격하여 무기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울러 같은 군 공촌면(公村面) 봉동(鳳洞)에서 화승총 3정, 엽총 1정을 징발하는 등 주로 병기 획득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6월 1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60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