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리지방은 호남교통의 요지로서 3월 26일 이래로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어, 일본의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전주(全州)·군산(群山)·익산방면의 통행자를 일일이 검색하고 있어서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이리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거사하기로 상의하고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정해진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이중에는 서울에 유학하던 중 귀향한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박영문(朴泳文) 등도 합세하였다. 이때의 상황은 일제가 이미 헌병과 보병부대로 병력을 강화하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의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점차 군중들이 늘어나 1천여명이 되고, 그 기세도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시 일본의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여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군중이 이에 대항하며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그 왼팔마저 베어 버리고 그는 두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이날 거사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의 거룩한 독립운동정신은 4월 5일 이후 군내의 각지에서 전개된 횃불 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21·522·53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8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