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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291
성명
한자 文鏞祺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19.4.4 이리(裡里) 의거를 주동 지휘하다 장렬히 순사하였으며 인근지역의 운동에 영향을 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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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리지방은 호남교통의 요지로서 3월 26일 이래로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어, 일본의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전주(全州)·군산(群山)·익산방면의 통행자를 일일이 검색하고 있어서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이리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거사하기로 상의하고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정해진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이중에는 서울에 유학하던 중 귀향한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박영문(朴泳文) 등도 합세하였다. 이때의 상황은 일제가 이미 헌병과 보병부대로 병력을 강화하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의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점차 군중들이 늘어나 1천여명이 되고, 그 기세도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시 일본의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여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군중이 이에 대항하며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그 왼팔마저 베어 버리고 그는 두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이날 거사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의 거룩한 독립운동정신은 4월 5일 이후 군내의 각지에서 전개된 횃불 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21·522·53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8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용기 호 : 관재(寬齋) 전북 익산(益山) 이리군 만세운동
본문
1878년 5월 19일 전북 익산군(益山郡) 오산면(五山面) 오산리(五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호는 관재(寬齋)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기독교를 믿으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08년 목포(木浦) 영흥학교(永興學校)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다. 이후 함경북도 갑산(甲山)에서 서양인 선교사의 조수와 미국 광산회사의 통역 등으로 일하다가 영흥학교와 옥구(沃溝) 영명학교(永明學校), 익산 도남학교(道南學校) 등에서 영어와 한문을 가르치며 교직 생활을 하였다.이리는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된 이래 철도 교통을 비롯한 호남지역 육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전국 각지의 만세시위 소식이 빠르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이리 읍내에서는 3월 26일 이래로 산발적이지만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919년 당시 전북 옥구(沃溝)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기간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비밀 회합을 갖고 이리 장날인 4월 4일에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같은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를 통해 영명학교 학생들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백여 장을 전달받아 시위 준비에 착수하였다.1919년 4월 4일 기독교인 등 300여 명의 군중이 이리 장터에 모였다. 이 가운데는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귀향한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박영문(朴泳文)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날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함을 역설하였다. 아울러 모인 군중에게 각종 격문을 나누어 주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위 참여자 수는 점차 늘어나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헌병대가 출동해 행진을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이리역 앞 큰길로 계속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더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여러 사람이 곤봉을 들고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자 일제 당국은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이리 읍내 소방대원들과 일본인 소유 오하시(大橋)농장의 농장원 수백여 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 곤봉, 갈고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시위대는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였고 이에 출동한 일본 군대가 무차별 사격까지 가해 사상자가 속출하였다.이때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 “여러 지역에서 독립 만세를 열심히 부르면서 조선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면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로 오른팔을 내리쳤고 태극기와 함께 오른팔이 절단되어 땅에 떨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였는데, 이에 일본 헌병들이 달려들어 그 왼팔마저 베어 버렸다고 한다. 두 팔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헌병은 그를 계속 구타하고 칼로 난자하였다. 이로 인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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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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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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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익산 3·1운동 기념비 전라북도 익산시
2 비석 (의정부)3ㆍ1운동 기념비 경기도 의정부시
3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4 동상 문용기 열사 동상 전라북도 익산시
5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6 비석 순국열사비 전라북도 익산시
7 동상 문용기 열사 동상 전라북도 익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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