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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252
성명
한자 盧桓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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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전주북중학교(全州北中學校) 교원(敎員)임을 이용 학생들에게 일제의 패망을 예언 민족의식을 고취 조국광복을 위한 기운조성을 위하여 계몽을 하다 왜경에게 피체되어 징역5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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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이다.

전주(全州) 북중학교(北中學校) 촉탁교원으로 있으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조국독립의 도래를 강의하다가 1942년 10월 31일 일제에게 붙잡혔다.

1944년 6월 12일 이로 인하여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44. 6. 12 전주지방법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노환 창씨명 : 안동환웅(安東桓雄) 전북 익산(益山) 민족의식 고취
본문
1916년 12월 13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황등면(黃登面) 율촌리(票村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안동환웅(安東桓雄)으로 고쳤다.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전주고등보통학교(全州高等普通學校, 현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1938년 3월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연습과를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삼기심상소학교(三箕尋常小學校)의 교원으로 임용되었으나 1년 만에 사직하였다. 이후 경성약학전문학교에서 약 4개월 동안 약학을 연구하여 약제사(藥劑師) 학과시험에 합격하였다. 서울에 있는 제약소에서 일하다가 1940년 8월 전북 이리(裡里, 현 익산시) 해돋이 심상소학교 촉탁교원으로 재직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약제사 실기시험에 합격한 후 대전(大田)과 전주의 각 도립병원에서 약제사 촉탁으로 근무하였다.1942년 10월 31일 전주북중학교(全州北中學校) 촉탁교원으로 취직하였다. 전주북중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던 중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국력, 특히 경제적으로 파탄한 일본은 결국 패전할 것이며, 점점 조선 독립의 호기가 도래할 것이다”라고 교육하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독립의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1942년 11월경에는 화학 강의를 하던 중 4학년생 김태기(金泰基) 외 45명에게 ‘수신(修身)교과서’에 대해 비판하면서, 학교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가르치나 실제 사회에서는 전혀 다르며 내선이 차별되었다”고 하는 등 한민족의 번영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현실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1943년 1월경 화학 강의 중 4학년생 약 50명에게 ‘현 시국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조선 청년으로서 크게 분기해야 할 때’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피폐한 농촌 현실과 일본인과의 차별 등을 비판하는 한편 아름다운 한국의 문화, 식민지배 하에 있는 한국의 상황 등을 설명하였다.태평양전쟁에 즈음한 1942년~1943년 사이 일제가 자국에 부족한 고무와 석유 등 주요 군수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등을 점령했음을 지적하며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을 비판하였다. 동시에 석유 및 기타 전쟁 물자가 풍부한 미국과 영국에 비해 물자가 부족한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되는 양상에서는 패전할 것이라며 일본의 패망을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이러한 교육을 받아 식민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나가던 전주북중학교 학생 박윤하(朴潤河)·김태기·최순기(崔淳基)·김병순(金炳純) 등은 1943년 1월경부터 징병제와 내선일체 등 식민지 현실에 대해 비판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고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이 같이 전주북중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다가 1942년 10월 31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4년 6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육군·해군형법 위반 등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풀려났다.해방 이후 약사로 일하다가 1960년 전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1994년 9월 12일 사망하였고,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 육해군형법위반 징역 5년 전주지방법원형사부 1944-06-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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