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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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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興汝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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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09. 2월 김성찬(金性贊)·정판성(鄭判成) 등과 함께 이원오(李元伍)((五))의 의병진에 가담하여 십수 명의 의병과 함께 화승총, 양총, 권총, 칼 등을 휴대하고 전북(全北) 익산(益山)·고산군(高山郡)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7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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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이원오(李元伍)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익산(益山)·고산(高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4∼5년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김흥여는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9년 2월 김성찬(金性贊)·정판성(鄭判成) 등과 함께 이원오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 수십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북 익산·고산 등 각 군을 돌아다니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72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흥여 - 전라북도 익산 -
본문
전라북도 여산군(礪山郡, 현 익산시) 북삼면(北三面) 방축리(防築里) 출신이다. 190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21세로 188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시장에서 짚신과 목화 등을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상인 출신으로, 이규홍(李圭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당하는 등 국권상실이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갔다.당시 호남지역에서는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거의를 결의하였다. 이후 거의(擧義)가 본격화되자 유림세력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 출신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의병부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규홍이 익산에서 거의하여 의병을 규합하자, 이에 호응하여 동참하였다.을사늑약 직후 호남에서 최초로 거의한 의병부대는 최익현(崔益鉉)을 중심으로 한 태인의병이었다. 1906년 6월 전북 태인군(泰仁郡)의 무성서원에서 창의 격문을 발한 뒤 공식적으로 거의한 태인의병은 전라도 각지를 순회하면서 의병의 세력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직전 의병장 최익현이 관군과 동족상잔을 피하고자 의병을 해산했기 때문에 큰 무력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태인의병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한지 열흘 만에 해산하였지만, 이후 호남지역의 의병 결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규홍은 1906년 4월 25일 친구 박이환(朴駬桓)·문형모(文亨模)와 거의할 것을 맹약하고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규합해 가며 1907년 12월 거의하였다. 이때 익산군의 정판성(鄭判成), 고산군(高山郡)의 김성찬(金性賛)과 함께 이규홍 의병부대에 찾아가 합세하였다. 곧이어 이규홍 부대는 박이환의 형인 박영환(朴永桓)으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아 총기 300여 정과 탄약 20여 되, 그리고 칼 50여 자루, 화약 10여 되를 마련하였다. 동료 의병 200여명과 함께 1907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해 갔다.먼저 이들은 1907년 12월 19일(음, 11월 15일) 고산군 가금리(柯琴里)에서 일본군과 첫 교전을 벌여 일본군 29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진안군(鎭安郡)·장수군(長水郡)·용담군(龍潭郡) 등지에서도 추격해 도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 44명을 사살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의병 탄압책이 더욱 거세지면서 여러 의병이 붙잡히는 등 전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의병장 이규홍은 1908년 5월 20일 부대를 해산하였다.이규홍 의병부대가 해산 된 이후에도 동료 김성찬, 정판성 등 동료 의병 수십명과 함께 전북 익산과 고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항일 유격전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던 1909년 2월 무렵 익산 군내에서 활동하다가 결국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이 일로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폭동 징역 7년 광주지방재판소전주지부 1909-11-2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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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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