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411
성명
한자 金根培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성균관(成均館) 박사직(博士職)에 있으면서 1905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소위 은사금(恩賜金)일절(一切) 거부하고 충절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돌을 안고 우물에 빠져 순절(殉節)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북도 이리(裡里)읍 모현(慕縣)리에서 태어났다. 1866년에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처하여 아직 약관의 나이로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성균관 박사로 있던 그는 이에 항의하여 그 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청장년들에게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며 교육에 주력하였다. 일제가 1910년 8월 한국을 병탄한 후, 조선총독부가 헌병주재소장을 통하여 그를 포섭하기 위해서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어 오자 이의 수령을 끝내 거부하고 앞으로 수없는 곤욕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돌을 안고 우물에 빠져 순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46면
  • 기려수필 191, 19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근배 자 : 광원(光元), 호 : 매하(梅下) 전라북도 익산(益山) 경술국치
본문
1847년 7월 15일 전라북도 이리읍(裡里邑) 모현동(慕縣洞)에서 아버지 김현교(金顯敎)와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이다. 7세 무렵부터 백재(栢齋) 김상호(金尙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조승옥(曺玉承)에게 사사받아 시문을 익혔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여 전쟁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프랑스군이 조기에 물러나면서 뜻을 거두었다. 1906년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가 되었으나 1908년 단발령 소식에 “부모가 남겨주신 몸을 훼손하고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을 바꾸어 오랑캐 풍속을 쫓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라고 하며 은둔하였다. 나주·김제·옥구 등지에서 은거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항일 정신과 독립 정신을 일깨우며 유학 공부에 힘을 쏟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일제가 지역의 원로들과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은사금(恩賜金)을 교부할 때 지역의 명망 있는 학자였기에 회유 대상이 되어 은사금이 교부되었다. 그해 12월 익산 주재 헌병소장을 통해 은사금이 전달되자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은 받지 않겠다” 하며 수령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회유와 포섭이 수없이 계속될 것을 알고 죽음을 결심하였다. “갑오년(1894) 이후부터 나라에 온갖 변괴가 발생하였다고 할 만하다. 우리 임금의 위호(位號)가 아직 있었을 때는 임금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의 강토를 이미 빼앗기고 임금의 위호 또한 없어져 버렸으니 이것은 참으로 군신이 사직을 위해 함께 죽어야 할 때다. 또 이른바 은사금은 내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의(義)를 들어 이 은사금을 받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감옥에 가두고 머리를 깎을 것이다. 모욕을 받은 후에 죽는 것보다 모욕을 받지 않고 죽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내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저 은사금을 받으라는 증표는 곧바로 돌려보내라”라는 유서를 아들 김종호(金鍾昊)에게 남기고, 또 그 의지를 절명시(絶命時)로 표현하였다. 만약 더러운 원수의 돈이 내 몸에 이른다면 생(生)과 의(義)를 함께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굴욕을 받고 사느니 차라리 의(義)를 따르는 것이 나으니 깨끗한 우리 집 우물에 인(仁)이 있도다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뜻의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1910년 12월 13일 돌을 끌어안고 자신의 집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 순절하였다. 그가 순절하자 일제는 아들 김종호에게서 유서를 빼앗고, 집에 빈소마저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순절이 마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항일 의식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의로운 선비로 추앙받았다. 또 제자들과 아들 김종호 등은 1931년 매곡사(梅谷祠, 전북 익산시 모현동)를 건립하여 그를 배향하며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유해는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129호에 안장되어 있다. 저술로는 『매하유고(梅下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당 대한이산 묘 전라북도 진안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근배(관리번호:841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